UPDATED. 2024-04-23 23:05 (화)
보편 인식 ‘철학’의 재생...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
보편 인식 ‘철학’의 재생...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
  • 김재호
  • 승인 2021.04.21 17: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책_『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 | 다케다 세이지 지음 | 박성관 옮김 | 이비 | 320쪽

오랜만에 흥미로운 철학 서적을 만났다. 쉽게 더욱이 명확하게 풀이된 이 책의 부제는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입문’이다. 저자는 재일조선인 2세인 다케다 세이지다. 본명은 강수차(姜修次)이다. 필명인 다케다 세이지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죽청(竹靑)'에서 따왔다. 그는 현재 와세다대 명예교수다.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언제나 논의의 끝은 ‘모든 건 상대적이다’로 끝나기 십상이다. 너와 내가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는지는 철학의 근본질문이다. 실존론적 인간에 대한 철학 연구를 해오고 있는 다케다 세이지가 그 가능성을 짚어본다. 

다케다 세이지는 철학의 역할과 본질을 “정신의 참된 전개를 위한 불씨”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불씨가 희미해져 다시 불타오르게 할 필요가 있다. 보편 인식이 불가능한 것은 철학의 가장 중대한 수수께끼 세 가지 때문이다. 존재, 인식, 언어. 이 세 가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극복해 보편 인식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보려는 게 바로 다케다 세이지의 저술 의도다. 종교와 철학을 비교해보자면,, ‘임의의 이야기 대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임의의 이야기로 그 세계를 확장해간다면, 철학은 “보편적인 공통 이해를 목표로 삼는 사고 방법”이다.  

그 출발점은 데카르트(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제1의 원리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강력한 주장을 내세운다. 인류의 보편 인식이 가능한지 회의론적 시각이 펼쳐지는 것이다.

존재, 인식, 언어에 대한 세 가지 수수께끼들

사회정치철학의 측면에서도 올바른 혹은 보편적인 세계관은 불가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넘어 정치경제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 고 있으나 그만큼이나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끝내 마르크스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까진. 이후 나타난 포스트모던주의는 인간을 더욱 파편화된 존재로 해체시켰다. 

다케다 세이지는 근대시민 사회를 형성시켰던 자유의 원리는 유럽 이외의 국가들에겐 오히려 폭력의 원리로 작용했다고 본다. 이런 흐름 속에서 보편 인식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 다케다 세이지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보편 원리로서 사회 원리는 “자유로운 시민 사회라는 이념뿐”이라고 책의 마지막에서 밝혔다. 

이 책의 출발은 그 유명한 고르기아스 테제와 상대주의다. 이는 둘 중 하나가 진리라는 전제 하에, 한쪽이 진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다른 쪽을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고르기아스 테제를 직접 보자. 

1) 무릇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혹은 존재는 증명되지 않는다.
2) 설령 존재가 있다 해도, 결코 인식되지 않는다.
3) 설령 존재가 인식되었다 해도, 결코 언어에 의해 제시할 수 없다. 

존재에 대해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라는 것 없다. 없는 건 없는 것이니까. 존재가 있다면 영원하거나 생멸할 것이다. 생멸하면 존재는 사라진다. 영원하다면 존재의 장소를 가져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 또한 존재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기에 생성도 아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고르기아스 테제를 격파하고 보편 인식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니체(1844∼1900)와 후설(1859∼1938)에 이르러 거의 해명된다고 다케다 세이지는 밝혔다. 인식론의 보편 가능성을 찾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시작이다. 

다양한 생각을 인정하는 상대주의(혹은 회의론)이 더 낫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케다 세이지는 “모든 사고가 죄다 상대적이라면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의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니체가 시사했듯이 결국 가장 강력한 자가 ‘진리’를 참칭하게 된다”라면서 “그렇게 되면 뭐가 선악이고 또 정의, 부정의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밖에 없게 된다”라고 적었다. 보편 인식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식은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인식이 중요한 건 사회정치적으로 확장되기 때문

다케다 세이지가 제시하는 해법은 니체의 ‘본체론 해체(다케다 세이지식 용어)’와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이다. 그는 현대 언어철학의 수많은 논의와 이론 개념, 비유 등이 결국은 ‘언어의 수학화’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불변하는 자연 영역에 대한 수학화는 가능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본질의 영역에서 수학화, 존재-인식-언어의 일치가 불가능하다. 다케다 세이지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존재도, 인식도, 언어도 본질적으로 애매하고 아날로그적이어서 이를 완전한 디지털성으로 환원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언어라는 것 자체의 본질은 다의성에 있기에 ‘동일 명제=동일 의미’는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칸트(1724∼1804)는 ‘물 자체’를 상정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존재한다고 봤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니체는 물 자체와 완전한 인식을 제거한다. 카오스의 세계에서 개별 존재로서의 세계만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올바른 세계 인식은 제거된다. 그리고 남는 건 세계 분절이다. ‘완전한 세계 인식(전지)’를 부정하면, 고르기아스 테제 역시 제거될 수 있다. 저자 다케다 세이지는 “기본적으로 인식이란 바로 개개 생물들 안에서 그 욕망-신체(=힘)와 상관적으로 생성되는 하나의 세계 분절이다”라고 밝혔다. 

니체의 사상이 자칫 상대주의로 비칠 수 있겠으나, 그의 세계 분절은 상대주의적 인식론의 해체까지 포함된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힘 상관성’이라고 다케다 세이지는 밝혔다. 그 논의는 책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라, 궁금한 이들은 그의 『욕망론』(제1권, 제2권)을 보면 된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진 않았다. 그의 다른 책 『니체 다시 읽기』(윤성진 옮김, 서광사, 2001)는 번역돼 있다. 

이와 관련해 다케다 세이지의 문장을 참고해보자. 

“니체의 구도, 즉 모든 인식은 각각의 생물이 지닌 힘의 원근법적 관점으로부터 성립한다고 하는 구도는, 그것이 생 세계의 생성론(생물들에게 세계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이론)이라는 점이 간과되면 상대주의적 관점으로서 쉽사리 받아들여진다.”(69∼70쪽)

한편, 『왜 당신들만 옳고 우리는 틀린가?』에는 후설의 ‘내재와 초월’의 일치가 설명된다. ‘주관과 객관의 일치(조우)’를 부정하는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아주 쉽게 설명된다. 

다케다 세이지는 어린이를 포함해 더 많은 사람들이 철학 테이블에 앉기를 바란다. 그래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