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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갈, 나무 심은 사람
민병갈, 나무 심은 사람
  • 교수신문
  • 승인 2021.04.1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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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수 지음 | 김영사 | 576쪽

천리포에 생명의 땅을 일군 민병갈 선생의 뜨거운 삶
나무가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꾼 어느 ‘나무광’에 대한 기록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쳐 천리포수목원을 일구었다. 나의 마지막 소망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자식처럼 키운 나무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는 것이다.” - 민병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천리포수목원에는 소금기 어린 박토(薄土)를 나무의 낙원으로 만든 푸른 눈의 한국인이 있었다. 바로 임산(林山) 민병갈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 천리포수목원의 설립자이자 최초의 미국계 귀화인 민병갈 원장의 삶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총체적으로 조명한 전기이다.
민병갈은 증권가의 큰손, 음악과 술을 즐기는 풍류객, 한국인보다 한국 문화를 사랑한 선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요함이 번뜩이는 수집광이자 공붓벌레였다. 무엇보다도 민병갈은, ‘나무가 주인 되는 땅’을 꿈꾼 자연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이 책의 저자 임준수는 민병갈 원장의 꿈과 정신을 기림과 함께 그의 치열했던 일생을 다각도에서 진솔하고 섬세하게 풀어낸다.
평생을 언론계에서 활동해온 저자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집요함과 정확함을 바탕으로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민병갈의 흔적을 꼼꼼히 추적했다. 민병갈 원장이 가족, 친구, 동료들과 나눴던 친필 서간 1,000여 통과 함께, 그가 한반도 해방,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 등 역사의 한복판을 누비며 직접 찍고 모은 사진 500여 장이 책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또, 미국 소도시 주간지부터 해외 유수 언론에 이르기까지 민병갈 원장과 관련된 기사와 인터뷰를 자료로 활용했다.
민병갈 원장과 가족처럼 교유했던 민병도 전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해 식물학자 이창복, 기업인 정주영·정인영 형제, 그리고 국내외 식물전문가들로부터 수집한 살아 있는 증언 역시 이 책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저자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천리포수목원 자료실에 잠들어 있을 미공개 자료들도 많다. 저자는 10여 년 동안 우정을 이어가며 2002년 민병갈 원장이 타계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저자가 수년간의 취재와 집필로 완성한 이 책에서, 영원한 자연주의자 민병갈의 삶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경험하며 한국인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인

나무에 대한 열정과 집념, 한국에 대한 사랑을 양분 삼아 생명의 땅을 일궈낸 민병갈 원장. 미국 펜실베이니아 광산촌 빈한한 집의 맏아들로 태어난 칼 페리스 밀러는 어떻게 운명처럼 한국에 뿌리내렸을까?
지금껏 민병갈 원장은 평생을 나무에만 쏟은 열정적인 원예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10여 년 동안 곁에 머무르며 그의 삶과 정신을 지켜본 저자 임준수는 더욱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민병갈 원장의 삶의 면모를 조명한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나무를 세계에 전파한 학술·외교적 역할을 했고, 대내적으로는 천리포수목원을 국내 식물학과 원예학의 인큐베이터로 운영하며 자연보호 운동과 한국 식물학 발전에 힘쓴 교육자의 역할을 했다. 또,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인이자,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대한민국 광복 직후 한국에 발을 디딘 이후 57년간 이어진 민병갈의 운명적인 한국 생활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시선은 해방기의 혼란상,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급박한 상황, 60~70년대 재건과 성장의 활기, 그 이후 문화적 다양성이 꽃피던 한국의 모습을 두루 거쳤다. 미군정 복무 기간 동안 한국인의 의식주와 한국의 자연에 매료된 그는 전역 이후에도 민간 신분으로 군정청 근무를 이어갔다. 1954년부터는 한국은행에 입사해 28년 동안 투자 분야 고문으로 일했다. 1960년대 초부터 한국 이름을 사용한 민병갈은, 1979년에 비로소 법적으로 한국에 귀화해 완전한 한국인이 된다.
한국 문화와 한국인, 그리고 한국의 자연에 대한 민병갈의 각별한 사랑은 그의 삶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정 근무 시절 민병갈은 틈만 나면 한국 시골 곳곳을 누비며 한국인들의 일상 풍경을 눈에 담았다. 민병갈의 한국 문화 탐구는 호기심을 넘어선 애정과 선망이었다. 그는 한자와 한글을 공부하고 싶어서 시간만 나면 인사동 고서점에 발을 들였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면서부터는 한옥에 입주해 살면서 집에서는 항상 한복을 입었다. 입맛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한옥에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해 정기적으로 김치 파티를 열었다.
의식주 모두를 한국식으로 하고자 했던 민병갈은 “나는 전생이 한국인이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평생에 걸친 헌신과 투자로 천리포수목원을 일구어낸 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민병갈 원장의 무한한 사랑과 동경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인천항에 상륙했을 때 이곳에 한 번 살아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한국인이었던 것 같다.” - 민병갈

나무들의 피난처가 된 ‘서해안의 푸른 보석’
천리포수목원의 아버지 민병갈의 열정과 나무 사랑

서해를 바라보는 바닷가에 보석처럼 자리한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자연 보호에 대한 개념이 미미했던 1970년대, 귀화 서양인 1호 민병갈 원장이 사비를 털어 건설하고 평생에 걸쳐 가꾼 생명의 낙원이다. 2000년 국제수목학회에서 세계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인증을 받은 천리포수목원은 ‘나무가 주인이 되는 땅’이라는 민병갈 원장의 자연 사랑 철학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이미 민병갈 원장은 한국의 자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숙원으로 삼았던 설악산 등반은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1963년 설악산 등반 중 민병갈은 식물학도 홍성각을 만나 나무에 대한 깊은 열정을 공유했고, 홍성각의 소개로 국내 식물학의 거목 이창복 교수와 교유하며 나무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열정적인 만년 식물학도가 된 민병갈은 또 한 번 운명 같은 계기를 만나게 된다. 즐겨 찾던 서해의 휴양지 만리포에서 딸의 결혼자금을 마련하려는 한 농부의 부탁으로 천리포의 거친 땅 3,000평을 산 것이다. 이곳은 이후 18만 평 규모로 성장한 천리포수목원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 식물학과 원예학 발전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국내 최초로 ‘인덱스 세미넘(Index Seminum)’, 즉 전 세계의 수목원, 식물원, 연구기관과 협약을 맺고 종자를 무상교환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해 보유 수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로써 천리포수목원에는 민병갈 원장이 완도에서 직접 발견한 토종 ‘완도호랑가시나무’를 포함해 700여 종류가 넘는 목련속 식물을 비롯, 1만 6,000여 종류의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민병갈 원장은 2002년에 산림청이 상신할 수 있는 최고 훈장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2005년에 국립수목원에 있는 숲의 명예전당에 동판 흉상이 헌정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89년에는 국제 원예계에서 가장 큰 명예로 여기는 베치 메달(Veitch Medal)을 영국 왕립원예학회로부터 받았는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사실을 책에서 밝혔다.
민병갈 원장은 2002년 운명하는 날까지도 자신이 사랑하는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이 잘 자라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금은 제한적 개방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천리포수목원은 민병갈 원장의 원래 뜻대로 종자 보존과 연구에 큰 힘을 쏟으며 나무들의 피난처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다.
천리포수목원이 후대에도 영원히 나무의 쉼터로 남아 있기를 바란 민병갈 원장의 뜻을 그대로 담은 이 책은 다시금 환경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깊은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나는 300년 뒤를 보고 수목원 사업을 시작했다. 나의 미완성 사업이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져 내가 제2의 조국으로 삼은 우리나라에 값진 선물로 남기를 바란다.” - 민병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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