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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1인칭 원리, 미해결 ‘의식’ 푸는 열쇠
한국어 1인칭 원리, 미해결 ‘의식’ 푸는 열쇠
  • 김창섭
  • 승인 2021.04.15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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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의미·통사 구조와 인지』 이정민 지음 | 한국문화사 | 792쪽

언어학과 인지과학, 인공지능 문제 
언어마다 다른 의식 표현의 처리 

저자 이정민 교수는 서울대 언어 학과에서 의미론을 담당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서 학문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그는 1970년대부터 논문 발표와 게재로 세계학계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1980년대 이래 언어학을 전공하거나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많은 학생과 연구자들에게 『언어학 사전』(박영사)으로 이미 친숙해져 있고,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운동을 시작하고 그 협동과정 신설을 이끈 학계의 원로이다. 

그가 지난 반세기 동안 발표해 온 의 미론과 통사론 논문들 가운데 인지과학 과도 접점을 가지는 것들을 다듬어 『의미·통사 구조와 인지』를 내놓았다. 저자는 책의 성격에 대해 “국어를 자료로 한 연구가 많으나, 이론 발전에의 기여를 목 표로 하고, 범언어적 비교에도 관심을 두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보편적인 이론을 위한 논의가 줄기가 되지만 우리말의 현상들에 착안한 근거들이 가지와 잎이 될 때가 많다. 

 

그의 흥미로운 발견 하나를 소개해 본다. 국어에는 ‘비가 그친 것을 안다’와 같 은 ‘… 것을 알다’와, ‘비가 그친 것으로 안다’와 같은 ‘… 것으로 알다’의 두 가지 표 현법이 있어서, ‘것을’ 쪽은 그것이 사실 임을 전제하고 ‘것으로’ 쪽은 사실이라고 전제하지 않음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영어의 ‘know’에는 ‘… 것을 알다’에 해당하는 사실 전제 표현만 있어서 ‘…것으로 알다’라는 내용을 표현하려면 ‘know’가 아니라 ‘believe’ 등 다른 동사를 써야 한다. 이는 인식론의 뜨거운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영어를 포함하여 대다수의 언어들이 이 교체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데 비해, 우리말과 다른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 어들에서 이 교체 표현이 허용됨이 발견됐다. 우리말의 이 현상은 저자가 70년대 에 발견했다. 이외의 알타이어들 즉 몽골 어, 만주어, 위구르어, 아제르바이잔어의 현상은 저자가 원어민 조사로 최근 발견 했고, 별도로 헝가리어와 터키어 현상도 알려졌다. 알타이어족 학설은 의미·통사 면의 탐구 소홀로 최근 지지가 약해지고 있으나, 저자는 이 인지적 태도 동사의 놀라운 공통 현상이 오히려 알타이어족 학설을 강화해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인지적 태도 동사의 공통 현상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통찰도 있다. 누가 현재 시제로 ‘어지럽다’고 할 때 우리말에서는, 전지적 시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이상, ‘나 어지러 워’처럼 1인칭 주어만 허락하고, 2, 3인칭 주어는 거부해 ‘저 아이는 어지러워’ 하면 어색하다. 왜냐하면 내가 타인이 될 수 없 기 때문이다. 한영 두 언어를 모두 모국어 처럼 사용하는 사람일지라도, 어지러워하는 메리를 관찰하면서 ‘메리는 어지러워’ 라고는 못하고 ‘Mary is dizzy’라고는 할 수 있다. ‘(… -고) 싶다’, ‘졸리다’ 등의 심리 형용사·동사들이 다 그렇다. 일본어도 매우 희귀하게 우리말과 같은 식이고, 프랑스어와 중국어 등 대부분의 언어는 영어와 같은 식이다. 

‘나’, 그중에서도 대상화 이전의 ‘나’와 ‘그 외’에 대한 의식 표현의 처리가 언어에 따라 다른 것이다. 왜 그럴까? 저자는 ‘대변자가 되어 말하기’와 ‘거울 반사 시뮬레이션’에 의한 설명을 논한다. 인공지능인 바둑의 알파고에게 자아 의식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심층학습의 인공지능은 자아를 학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식’이 야말로 현대 철학과 과학의 핵심적인 미해결 문제라고 한다. 다시 말해, 과학이 발달 해 뇌신경 속의 어떤 화학적 변화가 어지러움을 유발하는지 다 밝혀져 Mary의 뇌 상태를 들여다 보고 알게 돼도 ‘메리는 어지럽다’라고는 못하는 주관성이 의식의 문제에 놓여 있다. 1인칭 원리의 현상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어 자료에 입각해 설명하는 것이 열쇠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미지=픽사베이

인공지능의 심층학습과 자아 주관성 

이 책은 현대 의미론의 주요 분야들을 다루고 있는 전문 연구서이다. 7개의 부에서 앞에 말한 ‘알다’와 같은 동사들의 의미론적 현상들, 영어와 우리말의 부정 문에 보이는 현상들(‘모조리’는 어떻게 행위자의 악의가 개입될까?), 조사 선택에 의해 문장 속 명사가 나타내는 정보들의 자격(알려진 정보인지, 초점이 놓인 것인지, 대조되고 또는 억양에 따라 양보적인지 등)이 표현되는 방식들, 사건을 확실성과 시간 흐름의 면에서 포착하는 방식들, 서술어가 나름대로의 명사들을 동원해서 문장의 얼개를 짜는 방식들, 흥미로운 구문들, 문장 구조에 의미가 관련되는 모습들, 어린이가 모국어를 배워가는 초기 모습들(심리 술어, 부정, 정보 구조, 양상과 상, 논항 구조, 구문, 문장 구조의 의미, 언어 습득과 인지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세계의 언어학자들과 토론하면서 발전시켜 온 전문성 높은 연  결과들이다. 분량으로 792쪽에 달하며 서술도 압축적으로 이루어져서 간단히 읽힐 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지난 세기의 후반기로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의 언어학이 세계 속의 언어학 연구에 활발하게 참여해 온 역 사의 한 부분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우리말의 특징들을 새로 알게 되는 즐거움도 맛보고, 언어에 비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편린들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창섭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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