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 / 서강대 사회학 © |
2003년 11월이었던가. 당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단식을 시작했을 때, 최대표가 제발 단식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가길 바랬다. 참으로 그 단식은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그 단식은 항의가 아니라, 그저 밥 굶기에 가까워 보였다. 1987년의 단식이 관습적 선택이었지만, 그 단식은 최소한의 정당성은 확보했었다. 단식을 통해 ‘협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일개 시민이었던 우리들에게 굳게 닫힌 공론장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때는 시민들이 합법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공론장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공론장에서 발언할 수 있는 야당 대표의 단식은 싸구려 ‘감성정치’를 겨냥한 선택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 단식은 참으로 잘못 선택된, 지지받을 수 없는 조롱거리 단식이었다.
습관적 단식도 있고, 최소한의 정당성도 결여된 조롱거리 단식도 있지만, 모든 단식이 습관적으로 시작되거나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단식은 숭고하다. 숭고한 단식은 관습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정당성을 획득한 단식이다. 습관적 단식도 때로는 정당성을 획득하지만, 숭고한 단식의 정당성과 습관적 단식의 정당성은 다르다. 정당성을 획득한 습관적 단식이나 숭고한 단식은 형식적 정당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선 같다. 국가가 개인의 저항권을 보장하지 않고, 국가권력이 중요 사안에 대해 ‘대화’하려하지 않고, 반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려 하지 않을 때, 단식은 개인과 집단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권의 표현이며, 이 과정을 거친 단식은 형식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형식적 정당성만으로 단식은 숭고해지지 않는다. 단식이 숭고해지기 위해서는, 형식적 정당성을 넘어서 단식이라는 표현형식 자체가 또 다른 메시지임을 입증해야 한다.
단식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건다. 시일을 정해놓은 단식은 저항으로서의 단식이라기보다 의례에 가깝다. 그런 단식에는 숭고한 단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정함과 비장함이 결여돼 있다. 단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항의를 표현할 수 있음에도, 단식이 선택되면 ‘감성정치’를 노리는 습관적 행위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단식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가 어떤 정치집단의 정치적 목적만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러한 단식 또한 숭고함과 거리가 멀다.
환경파괴로 인한 위험, 전쟁으로 인한 위험은 지구와 우주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한 위험이 우리를 덮칠 때,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한 없는 단식, 그렇기에 단식하는 사람의 생명조차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단식은, 생명이 걸린 단식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 모두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전달하기에 숭고하다. 숭고한 단식은 목숨을 건 표현을 통해, 위험에 대해 경고하면서,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를 중단시키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습관적인 단식과 어이없는 단식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던지지만, 숭고한 단식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왜 우리는, 그리고 언론은 최병렬 대표의 단식보다, 전쟁에 반대하는 김재복 수사의 단식과 생명파괴에 반대하는 지율스님의 단식에 대해 무관심한 것인가. 숭고한 단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만, 습관적이고 어이없는 단식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덕택에, ‘감성정치’에 호소하는 숭고하지 않은 단식은 또 누군가에 의해 되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