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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교수신문
  • 승인 2021.04.0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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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모 지음 | 한겨레출판사 | 288쪽

좁은 길과 높은 언덕 넘어
질병 아닌 ‘사람’을 만나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환자와 의사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낀다.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 안에 들어서면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금방 얘기를 끝내고 나가줘야 할 것 같다. 의사는 좀처럼 환자의 얼굴을 보고 말하지 않는다. 환자보다 모니터의 차트와 사진을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짧은 진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왕진을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환자는 ‘한 사람’으로 자신의 삶 속에 앉아 있다.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 하나만 눈에 들어와도 그는 이미 특정 질환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의사에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잉 진료나 3분 진료가 불가능하다. 왕진이 환자의 입장에서도 물론 필요하지만 의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왕진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 진료실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절대 같은 의사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90쪽)
이 책의 1부 ‘찾아가야 보이는 세계’는 그 왕진이라는 경험이 알려준 ‘진료실 너머’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는 여든의 노인이 고작 ‘멀미’ 때문에 몇 년째 병원을 못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말로만 들었을 때는 의아했지만, 높은 고개를 넘어 실타래처럼 꾸불꾸불한 길을 지나다 속이 울렁거려 차를 잠시 세우고 나서야 저자는 노인을 이해하게 된다. 당뇨에 중풍, 치매까지 동반된 남편에게 아침저녁으로 인슐린 주사를 놔줘야 하는 아내는 눈이 침침해 주사기의 단위를 읽을 수 없고, 결국 저자는 이 노부부의 이웃에 사는 다른 당뇨 환자에게 할아버지의 주사를 부탁하고 나온다. 굳어진 무릎 관절 탓에 몇 년간 바깥 구경 한 번을 못한 할머니의 골방엔 지린내를 없앤다고 자식들이 갖다 놓은 숯이 덩그러니 있다. 이러한 삶의 맥락 속에 놓여 있는 환자를 의사가 그저 모니터 안의 차트가 말해주는 ‘질환’으로 치환하기는 어렵다.

“마을 주민들 간의 관계가 어떤지는 통증 주사를 놓아보면 대번에 안다. 통증 주사를 맞고 있던 신 할머니가 그런다. ‘여기 옆집 송 씨도 허리가 아파서 애를 쓰잖아. 허리 아프다면서 일을 할 건 다 해.’ 거기를 가보란 얘기다. 송 할머니 집에 가면 또 그런다. ‘이 위에 윤 씨 있잖아. 그이가 그렇게 무릎이 아픈가벼.’ (…) 서로가 서로를 돌봐준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_42쪽

‘의사 놈들’과 ‘의사 선생님’ 사이
어른거리는 얼굴들

저자가 의사 생활 내내 왕진만 했던 것은 아니다. 2부 ‘어른거리는 얼굴들’에서는 평범한 봉직의로 일하는 동안 마주쳤던 사람들, 고민했던 문제들, ‘의사 놈들’과 ‘의사 선생님’ 사이의 후회와 반성이 때론 격렬하게, 때론 담담하게 그려진다. “2분마다 환자가 들어오는 곳에서 정성 어린 진료를 하려면 인공지능 수준의 판단력과 부처님 수준의 마인드 컨트롤이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118쪽)고 저자는 말한다. 좋은 의사가 되려는 마음과 달리 한국 사회의 의료 현실은 그를 차갑게 시험한다. 진료실 밖에 환자들이 밀려 있을 때면 당장 앞에 있는 환자를 빨리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며 그는 괴로워한다. ‘의사로서 정말 이게 바닥일까.’ 하지만 그에겐 ‘어른거리는 얼굴들’이 있었다.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봄 산에 올라가 직접 딴 나물을 건네주는 할아버지의 딱딱한 손, 새벽부터 개천 주차장 구석에서 야채를 팔다 병원 문 열자마자 약을 타러 와서는 얼른 가봐야 한다고 재촉하는 할머니의 빠듯한 하루, 오르막길에서 당신 몸보다 더 큰 리어카를 두고 어찌할지 몰라 하는 노인들이 병원까지 걸어왔을 시간…. 저마다 고단한 삶을 살아내려 애쓰며 아픈 몸을 다독이는 이웃들의 풍경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게 만든다.
처음 의사 생활을 시작한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의 이야기도 나온다. 동문 모임에 가서 의료생협에서 일한다고 하면 “그게 뭔데요?”라는 시큰둥한 반응들이지만, 동일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들이 받는 것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으로 일한다고 말하는 순간 분위기는 반전된다. 차로 한 시간 넘는 거리를 일부러 찾아와 통증 치료를 받는 노부부가 복숭아를 보내줬다는 이야기에는 무반응이었던 이들이 갑자기 저자를 존경하는 듯 바라보는 것이다. 돈이 지배하는 병원이 싫어서 시작하게 된 일에 대한 가치도 돈으로 저울질되는 아이러니.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뜻’ 이전에 물질로 교환되기 어려운 행복으로 지탱된다는 걸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그리고 3년 후 원주의료생협은 전국에서 동일 질환으로 처방하는 약의 개수가 가장 적은 상위 5퍼센트 병원에 든다. ‘어른거리는 얼굴들’을 보지 못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인 것은 분명하다. 열은 떨어져야 하고 기침은 줄어야 하고 산소 수치는 정상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료실 안에서 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환자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듯 진료실 안에서 나 또한 의사로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픈 사람과, 그 아픈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진료실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질환에 대한 치료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때론 그 상호작용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환자에게 더 큰 의미가 되고 그럼으로써 의사 본인도 큰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_180쪽

세상의 중심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 고통, 보이지 않는 세계 쪽으로 움직여온 저자의 삶은 ‘공고한 엘리트?기득권 계층’이라는 의사에 대한 세간의 관념을 깨뜨린다. “환자들은 진료실을 나가도 환자로서의 삶이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의사의 역할은 진료실을 나가는 순간 끝나는 걸까.”(284쪽) 지금 여기의 공동체에 던지는 저자의 근본적인 질문은 3부 ‘우리를 마중하는 세계’에서 더 명료해진다. 사회적 고통에 대한 태도는 그 사회 자체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그는 말한다. 아픈 사람이 움직일 때 통증이 일어나는 부위에 온 신경을 집중하듯이 사회가 변화의 방향을 정할 때는 그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논쟁의 중심이 됐던 의사 파업과 의대생들의 고시 거부, 지역의사제 공론화 등을 바라보며 저자는 ‘밥그릇 싸움’ 이후의 시간에 대해 묻는다. 국가와 의료의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힘이 시민들의 건강에 고스란히 연결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를 던진다.

“공공의료의 결여가 누군가에게는 추상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고통이다. (…) 지난 수년 동안 할머니의 집을 방문한 사람은 최근의 나를 제외하면 딱 두 사람뿐이었다. 요양보호사와 이상한 사람(병원 브로커로 의심되는 그는 원하지도 않는 한의원 진료를 보게 해서 할머니를 화나게 만들었다). 행정 계획을 세우는 이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와서 현장을 보는 일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골집에 갇혀 누워 있는 분들의 목소리는 결코 복지 공무원의 책상머리까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_219~220쪽

한 사람의 건강을 넘어 한 사회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아 나서는 저자의 일상은 시민사회 곳곳으로 넓어지는 동시에 ‘가장 아픈 곳’으로 수렴되기를 반복한다. 생활방사능 문제로 시청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골프장 반대 농성을 위해 도청 앞에서 밤새 천막을 지킨다. 아파트 동대표에 홀로 입후보해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최저임금 문제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의사의 길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는 막다른 골목에 낙심하다 이웃의 손길 하나에 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한계를 실감하는 순간 슬픔에 잠기다가도 ‘마음이 있으면 길은 보인다’고 믿으며 왕진가방을 챙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웅크린 아픔이 있듯 보이지 않는 마을에 이런 의사가 있다. 사랑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는 것들이 떠나간 듯한 시대,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사랑과 인간을 믿는 한 의사가 ‘평범한 이웃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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