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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9] ”모든 중앙집권통치는 감옥과 같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9] ”모든 중앙집권통치는 감옥과 같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4.0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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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엘리제 르클뤼②

1871년 3월에 터진 세계 최초로 노동자 계급이 세운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제2제국 정부의 무능함에 반발한 프랑스 민중이 일으킨 항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의 르클뤼 형제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파리코뮌이 선언되었을 때 형제는 적극 가담했고 엘리 르클뤼는 에두알 바이얀의 지휘 아래 국립도서관과 루브르박물관 경비대에서 일했다.”(김유곤 옮김, 578쪽) 이어 엘리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르클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당시 르클뤼는 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섰다. 프로이센군과 결탁한 정부군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가 싸움에 나선 대의는 더욱 컸다. 그가 싸움에 뛰어든 이유 중의 하나는 파리코뮌이 터지기 2년 전에 병으로 아내가 죽은 것이었다. 당시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다가오는 혁명의 목표는 평등을 확립하고, 물질생활과 지식생활의 특권제를 폐지하며, 주인과 하인의 대립, 부르주아와 노동자와 농민의 대립을 폐지하는 데 있다. 이러한 싸움을 위해 이토록 오랫동안 참아왔으니 이제는 평화와 우애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번 혁명이 조금은 더디어 그렇게도 열망해온 그 평등이 과연 올 것인지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손을 위해 일하자. 폐허 속에, 또는 유혈 속에 다시금 일보 전진하자.”

 

 

아내가 죽은 뒤 르클뤼는 철저한 채식주의자(비건)가 되었다. 썩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혁명으로 평등을 모든 사람에게 주고, 평화와 우애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총을 들었지만 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4월에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그는 문맹인 죄수들에게 읽고 쓰는 법, 심지어 영어를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에는 『지구』라는 책을 썼다. 르클뤼는 군법회의에서 뉴칼레도니아 섬에서의 종신형을 선고 받고 야전병원과 감옥을 전전한 뒤 프랑스 지리학회와 다윈을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의 호소와 미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 1872년 1월에 10년의 국외 추방형으로 감형되었다.

파리코뮌이 터지고 34년이 지난 1905년, 르클뤼는 『인간과 대지』 제5권에서 파리코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인터내셔널에 의해 선언된 우애의 이념이 어떻게 생생하게 현실화했는가를 놀랍게 확인시켜주었다. (중략) 파리코뮌을 현대의 진화에서 높이 위치시켜야 하는가는 지배자를 타도한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바쿠닌∙크로포트킨과 교류… ‘아나키스트 선언’

 

지리 조사 여행도 계속한 르클뤼는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을 조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 피렌체에 살고 있던 바쿠닌을 만났다. 그들은 ‘평화와 자유를 위한 회의’의 제2히 베른 대회에서 협력했으나 함께 그 회의에서 탈퇴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소원해졌으나 서로 존경하는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1876년 바쿠닌이 베른에서 죽었을 때 인적이 드문 장례식에 르클뤼는 참석했다.

스위스의 루가노에 살면서 지리학 전문지로부터 사상지에 이르는 여러 잡지에 글을 썼다. 특히 1875년부터 1892년까지 매년 한 권씩 『새로운 세계지리, 대지와 인간(La Nouvelle Géographie universelle, la terre et les hommes)』 19권을 썼다. 권당 1천 쪽 전후로 전부 3천500장의 지도가 수록된 이 책은 단순한 지리서가 아니라,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총동원하여 각 지역의 생활, 풍속, 지형지질, 동식물의 분포 등을 종합적으로 서술했다. 한국에 대해서도 34쪽으로 설명하는데 한국을 이탈리아와 유사하다고 본 최초의 지리학자인 르클뤼의 스승인 리터와 마찬가지 의견을 피력했다.

 

『새로운 세계지리, 대지와 인간(La Nouvelle Géographie universelle, la terre et les hommes)』(1875~1892)
『새로운 세계지리, 대지와 인간(La Nouvelle Géographie universelle, la terre et les hommes)』(1875~1892)

 

스위스에서 그는 레르미네스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2년 만에 죽었다. 그래서 클라란으로 이사해 앞에서 말한 『산의 역사』를 썼다. 당시 파리코뮌에 참여했던 많은 종료들이 스위스의 아나키즘 중심인 쥐라 산맥 지역에 살면서 조합운동을 하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의 북쪽, 프랑스와·스위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그곳의 지층 구조에서 지질 시대인 쥐라기의 이름이 붙었다. 그곳에는 1977년부터 크로포트킨이 살고 있었다. 그는 1872년에 처음 그곳으로 와서 쥐라연합 사람들과 접촉한 뒤 러시아에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구금된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다시 그곳에 왔다. 르클뤼는 크로포트킨이 발간한 아나키스트 신문 <반역자(Le Révolté)>에 투고하고 함께 활동했다. 이를 이유로 프랑스 정부가 리옹 고등 법원에서 기소를 시작하고 크로포트킨을 체포하고 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르클뤼는 스위스에 남아있어서 처벌을 피했다. 그 후 르클뤼는 크로포트킨의 글을 모아 『반역자의 말』을 출간하면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주인이다. 관청의 자리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자유의 말에 공허한 기대를 걸고 저 소란한 의회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밑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이 책이 나올 무렵 프랑스에서는 선거가 한창이었다. 그에 반해 르클뤼는 우리 모두 자신의 주인이니 정부든 의회든 무엇이든 다른 것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고, 대신 나도 그 일원인 노동자 농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표트르 크로프트킨이 1879년부터 1885년까지 발행했던 아나키스트 신문 '반역자(Le Révolté)'. 사진=영문 위키피디아
표트르 크로프트킨이 1879년부터 1885년까지 발행했던 아나키스트 신문 '반역자(Le Révolté)'. 사진=영문 위키피디아

 

르클뤼는 이 때부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파리코뮌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과거의 전제정은 물론 공화정보다 뛰어난 것이었지만 중앙집권적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고, 이유도 모르고 그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에 실패하여 포로로 잡혔다는 반성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희망대로 자주 자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를 명백하게 보여준 1877년 3월 3일, 생 이미에(St Imier)의 쥐라연합(Jurassian Federation)에서 행한 ‘아나키 상태와 국가’에 대한 연설에서 르클뤼는 “모든 근대국가는 중앙집권화하고자 한다. 어떤 중심에서 모든 것을 통솔하고자 하는 생각은 감옥 모델과 비교할 수 있다. 그것과 달리 모든 것을 국가에 포섭하는 것에 반대하여 사회의 생생한 힘을 형성하는 자유의 집단을 나는 솔선하여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인종차별 반대하고 ‘결혼 반대’ 운동 전개

 

그는 자유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어원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로 '아나키 상태'라는 용어의 사용을 옹호했다. 그리고 국가는 '인간성이라는 힘의 자유연합'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고, 법은 '자유 계약'으로 넘어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르클뤼는 아나키 상태가 먼 미래의 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유 사회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영구적이지 않고 변화하는 요구에 적응할 것이기 때문에 제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나키스트 이상을 '특권과 정부 변덕의 억압, 재산 독점의 파괴, 자연법에 대한 상호 존중과 합리적 관찰에 의한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사회의 자발적인 기능'으로 보았다. 르클뤼의 주장에 따라 라쇼퐁(La ChauxdeFonds)의 쥐라 연맹 총회는 1880년에 자유 사회의 기본 단위로 기존의 행정 공동체가 아닌 '자연 공동체'를 채택했다.

르클뤼는 1879년에 사면을 받았지만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1880년에 그는 진정한 적들이 사유 재산의 소유자이자 수호자임을 분명히 했다. 사유 재산은 소수에 의한 집단 재산의 부당한 착취이기 때문에, 그는 노동의 결실의 개별적인 회복으로서 정당한 절도를 인정했다. 그의 유일한 단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도둑질이 저질러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나 그 결과가 아니라 그 이면의 의도라고 본 그는 복수를 불의에 대한 필연적인 대응으로 간주했고, 당시 테러 폭격기라고 불린 ‘라바콜’이 원시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반역자였다고 주장했다.

 

스위스의 아나키스트 조합 '쥐라연합(Jurassian Federation)' 로고
19세기 스위스의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쥐라연합(Jurassian Federation)'의 로고

 

개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나키즘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또한 “이해관계의 연대성과 자유롭고 공동체적인 삶의 무한한 이점이 사회적 유기체를 유지하는 데 충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점에서 인종주의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해방과 양성의 평등을 옹호했다. 남자의 잔인한 성적 힘에 기반한 가부장제와 달리 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착에 기초한 모계사회는 관습의 세련미와 사회 진화의 더 높은 단계로 이어졌다고 본 그는 유럽 ​​문명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것이고 사유 재산이 박멸될 때에만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완전한 남녀 공학을 요구한 그는 남성과 여성이 자유로운 결합을 형성하고 오로지 애정에 근거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전통적인 것이었지만 공식적 또는 종교적 인정 없이 두 번째 두 동반자와 '결합'했고 1882년에는 결혼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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