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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위험한 덕분에 나는 안전합니다
당신이 위험한 덕분에 나는 안전합니다
  • 박강수
  • 승인 2021.04.06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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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리뷰_『황해문화』(110호, 2021.봄)

 

안전은 모순적이다. 인권과 시민권의 한 축을 이루는 기초적인 권리이자 욕망인 한편, 전체의 안전을 위해 일부의 안전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권력의 의지가 투영된 ‘예외 상황’에서는 폭력적 요구가 되기도 한다.

올 봄 110호를 맞은 『황해문화』의 테마는 ‘안전’이다. 편집위원인 진태원 씨는 권두언에서 “안전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 모순적인 측면”이라고 소개하며 “안전에 대한 요구는 가령 쾌적한 환경, 편안한 주거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혐오시설 철거, 불법이민자 추방,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요구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예를 들었다. 안전할 권리는 때로 차별할 권리가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다섯 편의 글은 다음 질문들을 경유한다. 안전에 대한 요구는 어떤 맥락 속에서 배제의 목소리로 휩쓸리는가. 안전한 사회의 편파성을 우리는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불평등할수록 안전한

 

첫 번째 글 「안전의 변증법, 혹은 민주적 권리에 내재된 모순」(정정훈)은 가이드를 제시한다. 필자는 글 말미에 발리바르의 해석을 동원해 안전/불안전(정상/비정상)의 경계가 혼란되는 양상을 다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전통적인 중심부 (서구)국가와 주변부 국가 사이 경계를 흔들어 “중심부 국가 내부에도 주변부가 존재하고 주변부 국가 내에도 중심부가 형성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는 곧 ‘안전한 중심부’와 ‘안전을 위협하는 주변부’ 사이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효과를 낳았고, 바짝 다가온 불안감은 ‘중심부 시민’의 목소리를 키웠다. 그들은 경계를 높고 견고하게 바로 세울 것을 요구한다. 이민자들을 막아서는 장벽은 그 표상이다.

중심부 시민의 입장에서는 불평등할수록 안전한(것처럼 느껴지는) 셈이다. 두 번째 글 「코로나, 기후, 핵에너지 위기를 통해 본 위험사회의 의미 변화」(김현우)부터는 안전과 위기에 대한 불평등의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김현우는 ‘위험사회’ 개념을 주창한 울리히 벡의 경고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를 인용하며 되묻는다. 정말 위험사회의 재난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가. 단적으로 기후위기만 따져봐도 “기후난민이 먼저 발생하는 제3세계”와 “화석연료, 축산 가공품의 편리와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은 서로 반대편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지적이다.

 

위험의 외주화와 위험의 이주화

 

위계와 거리감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국경이나 위도를 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안전의 상품화와 위험불평등의 사회」(이승윤)는 한국사회의 노동현실을 돌아보며 “어떤 노동자들은 왜 더 위험에 노출되는지” 살핀 글이다. 알려진 것처럼 일평균 6~7명의 노동자가 죽는 한국의 산재 사망률은 OECD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노동자의 죽음에도 ‘급’이 있다는 점이다. 이승윤 씨는 영세한 사업장일수록, 고용이 불안정한 형태일수록 산업재해율이 높다는 점을 짚는다. 요컨대 “한국 산재사망 사건의 86%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어나고, 일하다 죽는 노동자의 90%가 하청노동자다.”

 

2019년 10월 20일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전국이주노동자대회. 사진=연합
2019년 10월 20일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전국이주노동자대회. 사진=연합

 

배율을 높이면 더 세밀한 죽음의 격차가 확인된다. 인종주의를 다룬 「배제의 정치학」(염운옥)에서 필자는 “3D 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산재 비율은 정주노동자의 6배, 산재사망은 4배에 이른다”고 지적하며 “’위험의 외주화’에 더해 ‘위험의 이주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더 복합적으로 소외될수록 재난의 강도도 커지는 것이다.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발행인인 김도현 씨는 「차별, 장애화, 불안전의 정치」에서 “장애인의 코로나19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지적한다. 영국의 경우 장애인의 사망률은 비장애인의 8배를 넘었고, 한국 또한 지난해 12월 기준 확진자 중 장애인은 4%인데 반해 사망자 중에서는 21%가 장애인이었다.

 

연대와 투쟁까지가 안전의 권리

 

관건은 정치다. 안전의 테두리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열거했듯, 안전은 모순적이다. 안전에 대한 요구가 원자화된 개개인의 이기적 외침이나 국가권력의 자기 보안을 위한 예방적 억압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시민들의 민주적 개입이 필요하다. 첫 번째 글을 썼던 정정훈 씨는 세월호 사건이 남긴 유산인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을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모든 사람의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 권리까지가 안전의 권리에 포함된다.”

부조리한 죽음들을 제도적 보완으로 돌려받기 위한 시민사회의 싸움은 더디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꾸준히 전진해 왔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5년 넘게 광화문 농성장을 지킨 장애인 활동가들의 투쟁, 비록 ‘누더기’가 되었으나 6년 만에 입법의 성과를 낸 ‘중대재해처벌법’ 등이 그렇다. 이제는 스스로 ‘안전한 중심부 시민’이라 믿는 다수가 응답할 순서다. 누군가의 안전을 희생시켜야만 얻어지는 편리와 질서는 지속가능한가. 전환의 시대, 불안전한 세계를 살아가는 모두의 앞에 놓인 물음이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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