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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정의
게으른 정의
  • 교수신문
  • 승인 2021.04.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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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지음 | 한겨레출판사 | 284쪽

“이 책은 정치와 무관했던 한 시민이 본의 아니게 정치인이 되어
시민을 대표하기 위해 애쓰면서 겪고 느낀 솔직한 심정의 기록이다”

형사 출신에 영국 유학을 거친 경찰대학 교수, 「그것이 알고싶다」 등 시사고발 탐사 프로그램 등을 통해 ‘프로파일러’, ‘범죄심리학자’로 알려지고, 『한국의 연쇄살인』,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등 저술활동을 해온 독보적인 범죄 분석 전문가. 2012년 12월 11일까지 표창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18대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의 여론 조작 의혹이 일자 그의 행보가 바뀌기 시작한다. 진실을 오염시키는 각종 찝찝한 의문들 앞에서, 표창원은 범죄수사 전문가로서 “다른 범죄사건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수사를 통해 진실규명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경찰대학 교수가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비난이 일자, 철밥통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택한다.
그 후 “한 사람의 시민이 자유로운 개인의 의사로, 자기 앞에 다가온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주장을 용기 내 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한다. 『정의의 적들』, 『표창원의 정면돌파』 등 대한민국 정치를 범죄심리학적 접근법으로 분석하며, 알기 쉽고 투명하게 정부와 국회의 면면을 밝혀왔다. 『게으른 정의』는 박근혜 국정농단에 대한 촛불혁명부터, 국민의 절대적 지지로 세워진 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판과 회의가 일기까지의 사건들, 그 우여곡절 중심에서 표창원 전 의원이 목격한 정치의 민낯이다. 또한 “용기 있게 옳은 소리를 하고 탄압과 핍박을 받아도, 어느 한쪽의 정치 진영이나 정당 편을 들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그래서 정치에 입문했고, 다시 정치를 떠난 ‘한 사람의 자기 고백’이다.

우리를 기만하며 더디 오는 ‘정의’에 대한
비판과 염원의 기록

1부. 여의도 프로파일링

이 책의 1부는 국회의원들의 과오와 행태, 갑질 등 실제 ‘정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 생생한 사건사고, 일상을 담았다. 보수와 진보, 여당야당 할 것 없이 아수라장, 아비규환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확한 사례들로 증명한다. 이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기준과 근거는 명확하다. 한국에서 오용되고 있는 ‘보수’, ‘진보’의 원론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에서 시작해, 옳고 그름을 과학적으로 수사하는 프로파일링 이론으로 비교분석한다. ‘법과 질서’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는 당시 자유한국당(지금의 ‘국민의 힘’)의 ‘패스트트랙 폭력 저지 사태’, ‘깨진 유리창 이론’에 빗대어 본 보수 정당의 행태들, ‘죄수의 딜레마’ 이론에 입각해 따져본 ‘여야 정당의 딜레마’, 국회의원들이 본업 아닌 다른 일들로 바쁜데, 그 ‘다른 일’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부끄러운 이야기, 학교폭력 같은 학대 심리에서 발동되는 ‘국회 내 갑질’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나아가 왜 우리 국회는 제도 구축에 소극적이며, 언제나 ‘더 못하는 쪽보다 덜 못하는 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만 주는 것인지 근본적인 원인들을 뾰족하게 들여다본다. 읽다 보면 답답한 속내가 시원해진다.

“국회의원의 배우자들은 ‘의원이 휴일도 없이 매일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는 바람에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힘들고 자녀 교육에도 어려움이 많다’고 한숨을 쉰다. 그런데 왜 국회의원들은 ‘일 안 하고 비싼 혈세만 축낸다’는 비난을 들을까?” - 본문 중에서

2부. 정의의 최전선을 고민하다

이 책의 2부는 ‘가짜뉴스’, ‘좀비 정치’, ‘썩은 사과 같은 비리 정치인’ 등 비극적 현주소를 훑는다. 지금 정치는 소속된 정당에 따라 상대를 무조건 공격하고 물어뜯는 ‘좀비 정치’다. 저자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 ‘좀비 정치’의 뿌리를 600만 명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역사까지 파고들어간다. 악행이 ‘평범한 일’처럼 자행되는 오랜 심리 속에서 지금의 가짜뉴스, 국가 사이버 테러, 인종 차별 등이 행해진다. 1부가 프로파일링 기법을 적용한 새로운 정치비평을 보여줬다면, 2부는 영화 [기생충], 부정부패를 ‘썩은 사과’에 빗댄 범죄학·행정학 이론, 부패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역사 등을 활용한 흥미로운 분석을 보여준다. 영화 「기생충」의 캐릭터를 국회의 여러 인간 군상에 빗대고, 썩은 사과가 남긴 ‘사과상자=국회’의 내막을 밝힌다. 전광훈 → 최태민 → 라스푸틴으로 거슬러 올라간 ‘정치와 종교’ 결합의 역사를 읽으니, 지금의 한국 정치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껏 넓어지는 듯하다.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사회 최상층 ‘동조형 엘리트’의 길에 들어섰다가 큰 욕심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동이나 기술로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이어가는 보통의 ‘의례형 인간’으로 돌아간 정치인,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찾기란 무척 어렵다. 권력이라는 욕구와 환상, 치열한 경쟁이 야기하는, 마약이나 도박처럼 아드레날린과 도파민 등이 분출되었던 극적인 경험이 평범한 일반인들에겐 허용되지 않으니 말이다.” - 본문 중에서

3부. 정치와 정치질 사이

이 책의 3부는 여야 정당을 넘어서 ‘국제적인 차별과 혐오’ ‘나라 망신시키는 외교관’ ‘한국 청년 정치가 나아갈 바’를 이야기한다. 미국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 즉 ‘카인의 후예’ 이론이 증명된 이 사건이 지금 한국에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내보인다. 또 ‘정치질’이 비단 국회에서만 횡행한 게 아님을, 철인3종 경기 유망주였던 최숙현 선수를 죽인 것도 ‘정치질’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세계 시류가 된 청년 정치의 모습을 각 국가별로 훑으며, 한국의 청년 정치가 어디쯤 와 있는지, 나아갈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 지구적인 기준과 잣대로 살핀 부분에선 한국 정치의 희망이 엿보인다. “정의는 때로 짓궂을 정도로 천천히, 하지만 반드시 온다”는 꿋꿋한 신념에 따라, 초심을 잃지 않으며 잊힐 수 있는 사건들을 낱낱이 기록한 『게으른 정의』는 중요한 선거들을 앞두고 반드시 읽어야 할 정치 교양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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