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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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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승철 강원대
  • 승인 2004.08.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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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적사에서 되새기는 ‘원칙의 외교정신’

제주도 정상회담으로 그나마 우호교린을 되씹던 매스컴이 8.15가 되니 다시 일본에 대해 논쟁의 포문을 연다. 근본적으로 일제 강점기 36년에 대한 청산이 안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일관계는 매번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
이번 8.15에도 어느 TV 특집방송이 일본 외무성과 美 국무성이 보관해 온 1965년 한일협정문서를 최초로 입수해 공개했다. 결론은 뻔하다. 당시의 지도자들이 역사관과 외교력의 부재로 부실한 협정을 맺었으며 그 결과 식민지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고, 결국 현재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공허한 메아리를 멈출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400여년 전의 역사가 우리에게 손짓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과 강화하는 과정이 1965년 수교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7년간의 무모한 전쟁은 조선인에게 아물 수 없는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 결과 조선인은 일본을 ‘不俱戴天의 원수나라’로 여기게 됐다. 불구대천이란, 말 그대로 함께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수라는 말이다. 이후 조선인에게 이러한 일본관은 뼛속 깊이 각인되었고, 마치 유전인자처럼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에 배어있다.
그러나 강화교섭은 의외로 빨리 진척되어, 불과 5년만인 1604년 6월에 사명대사를 探賊使로 파견하였다. 탐적사 일행은 쓰시마를 거쳐 교토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고, 이듬해 5월에 귀국했다. 이후 조선은 세 가지의 강화조건을 제시해서 관철시켰다. 그 결과 1607년, 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파견하여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양국국교가 다시 재개됐다. 그런데 국교재개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의 역사용어에서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탐적사, 그것은 글자 그대로 적을 정탐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탐적의 적자로 적대관계에 있는 敵國이 아니라, 도적놈을 의미하는 도적 賊자를 쓰고 있다. 일본은 도적놈의 나라이며, 임진왜란을 도적놈이 몰래 남의 집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전쟁의 성격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인식이다. 정말 놀랄만한 역사관이요, 현실인식이다.
또한 조선에서 강화조건으로 제시한 조건도 주목할 만하다. 첫째가 ‘先爲致書’로, 강화를 요청하는 장군의 국서를 일본국왕 명의로 먼저 보내라는 것. 국왕명의의 국서는 조선국왕과 일본국왕의 대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국서를 먼저 보낸다는 것은 침략을 사죄하고 강화요청을 먼저 하라는 의미였다. 둘째, ‘犯陵賊縛送’. 선릉(성종 정현왕비의 능)과 정릉(중중의 능)의 도굴범을 잡아서 보내라는 것이다. 일본군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지금의 압구정동 옆인 청담동 선정릉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왕릉을 도굴했다. 조상의 묘를 도굴 당했다는 것은 조선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국가의 체면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被擄人刷還’.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죄 없이 끌려간 백성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것이다. 이때 시작된 피로인쇄환은 전후 30년이 지난 1636년 통신사에게까지 이어진다.
참으로 대단한 외교였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대등한 국가관계로 설정하고 국가의 체면을 되찾으며 국민의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재정립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의 과정을 보면 일본에서 국서를 위조하고 거짓범인을 잡아 보내는 등 외교적인 사기극이 있었지만, 어쨌든 조선의 조건은 수락되어 국교가 재개 됐다. 그러나 조선은 강화사절의 명칭을 ‘通信使’라 하지 않고, ‘回答兼刷還使’라 했다. 먼저 보내온 장군 국서에 대한 회답과 피로인을 쇄환한다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통신이란 신의와 도리를 통하고 지킨다는 의미인데, 외교적 사기극을 행한 일본과는 신의를 통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시 대일 외교를 담당했던 위정자들의 분명한 외교자세와 그 주체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씨 피살사건, 그리고 미국과 남북 핵문제, 어느 하나 외교문제 아닌 것이 없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까지 가세해 올 여름 더위를 더욱 짜증나게 한다. 이 상태로 나가다가는 한중관계가 어떻게 될지 매우 우려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과연 올바른 역사관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외교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탐적사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다. 한?중?일 세 나라, 참으로 함께 살아가기 힘든 동반자다.

손승철 / 강원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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