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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평화란 이름의 '테마파크' 혹은 구태의연함
미술비평_평화란 이름의 '테마파크' 혹은 구태의연함
  • 김장언 미술평론가
  • 승인 2004.08.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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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언 2004 세계 100인 미술가' 전

‘평화’라는 단어가 하나의 정치적, 문화적 이벤트로 전환됐을 때 그 단어는 언제나 나를 배반해왔다. 반공교육과 평화통일을 위한 웅변대회 같은 학내행사에서부터 정권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홍보하기 위한 대규모 체육행사 속에서 평화개념은 명확히 살아 숨쉬고 있지만 현실에서 그 의미를 체험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요원한 것 같다. 더군다나 우리 현실을 공포로 몰아가면서 그 극복을 위해 우리의 정신적?육체적?물질적 요소들까지 동원하고 종국에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그 숨겨진 의도와 목적을 봉합해버리는 정치적 이벤트들을 수없이 경험했던 우리에겐 더욱 그렇다.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려 한 금강산댐의 공포를 우린 평화의 댐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현실은 그 사건이 국가적 사기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판명 났다. 도라산 역의 ‘평화의 선언’은 공포심을 조장해 강화하려 했던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의 하나였던 땅굴 견학의 새로운 페다고지로 전환됐다.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텅빈 驛舍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꾸며진 하나의 무대며 테마파크라는 것 밖에 없다. 더욱이 얼마 전 김선일 사건은 평화 개념이 얼마나 다른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보여줬다. 정부는 평화를 위해 파병한다고 공표했지만 그 선언에 의해 한 시민은 목이 잘려 나갔다. 더 이상 극동의 전쟁이 우리와 무관한 정치적 현실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 체험한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모두 평화를 주장하고 갈망하지만 그 평화에 대한 입장과 접근은 상이하며 둘 사이의 충돌은 엄연한 현실로 우리 앞에 서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의 현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갈등에 의해 촉발되는 테러와 전쟁의 공포가 현재 우리의 일상을 뒤덮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분단국가 그리고 휴전상태인 한국이라는 현실공간에서 국내외 저명한 작가들을 통해서 평화의 선언을 촉발하고자 하는 전시를 기획했다. ‘평화선언 2004 세계 100인 미술가’展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단연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현재 정치적 상황은 결코 평화와는 요원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평화를 요청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한국의 분단이라는 현실과 북한문제 그리고 이라크 전쟁 등과 같은 현실과 중첩되면서 그 필요성을 역필하고 있다. 크게 이번 전시는 전시개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과 그 비극, 그리고 갈등과 상처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평화를 위협하는 현실적 문제들, 폭력과 억압 및 차별에 대해서 그리고 평화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을 이루는 작업들을 전시하고 있다.

작가들의 구성은 국외의 경우는 정치적, 역사적 사실과 개인적 트라우마에 대한 지속적인 작업을 보여줬던 작가들로 구성된 반면, 국내의 경우는 민중미술을 통해 지속적으로 사회 참여적 작업을 보여줬던 작가들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 및 원로들 까지 포함돼있다. 서용선은 전쟁의 공포와 현실을 팔이 잘려 절규하는 군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권순철은 피폐한 현실에 널부러진 육체를 표현주의적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으며, 블라드미르 벨리코비치는 참수된 육체가 거꾸로 허공에 매달린 모습을 통해서 전쟁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종구는 전쟁이 남긴 현실을 폭격으로 황폐화된 바그다드 거리에서 수집된 사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멘도르프는 독일의 자기반성적 입장을 서사적 회화로 보여주고 있으며, 안젤름 키퍼는 할아버지를 전쟁에 보내지 않기 위해 해바라기 밭에 숨겨준 소녀들의 일화를 그가 지속적으로 탐구했던 역사적이고 서사적인 회화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윤석남은 새로운 피에타를 제작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에서의 화해와 치유를 생각하고 있으며, 강익중은 지난 2000년부터 보여줬던 십만인의 꿈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희망과 꿈을 어린이들을 통해서 확인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번 전시를 개최하면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최초로 전시하고자 했던 의욕을 보이기도 했지만 여러 사정들에 의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피카소의 작품이 한국에 올 것인가와 같은 저널리즘적 호기심도 아니며 저명한 작가들에 의해서 평화가 선언됐다고 하는 현재의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평화를 만들기 위한 어떠한 준비를 우리 미술이 진행해왔는가에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선언문을 보냈던 알랭 쥬프르와는 현재 문화적 다양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정치적 현실에 현대미술은 무기력하게 두손을 들고 있으며 이러한 미술계의 현실에서 용기있는 결단을 내린 국립현대미술관의 용기에 치하를 보낸다고 하지만,

그의 판단은 동시대 미술계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동시대 미술은 정치적 현실에 개입하고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문화적 동일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실험을 1990년대 이후 줄기차게 지속해왔으며, 그에 대한 가시적 성과를 어느 정도 이뤘다고 보여진다. 지난 2002년 카셀 도큐멘타는 그 대표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작가들의 개입과 현실정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기 위한 지금까지 실험들의 집합지였으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거대한 플랫폼이었다. 우리는 예술과 사회가 대화하기 위한 장대한 여행을 그 전시를 통해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한 쪽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CNN도큐멘타라고 조롱하기도 했지만, 현재 진행형으로서 사회와 긴밀하게 소통하는 미술의 움직임에 대한 의의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따라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그 취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함을 감출수가 없다. 우리 미술계가 평화를 위해 사회 변화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으며 어떤 노력의 결과물들은 가지고 왔는지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평화는 결코 선언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거장들의 권위를 앞세워 그들의 이미지를 통해서 평화를 논하겠다는 생각들 역시 어딘가 모르게 권위적 형태로 전화되고 치원됐던 지난날의 문화적 이벤트를 재확인하는 것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김장언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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