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21:10 (화)
한국사회에 거리 두지 않기
한국사회에 거리 두지 않기
  • 안지은
  • 승인 2021.04.01 08: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사 1년 차의 일이다. 각자의 연구주제를 간단히 소개하는 자리였다. 미국에서 학부과정을 마치고 막 석사과정에 입학한 중국인 친구가 유창한 영어 솜씨로 본인의 연구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 서부 대학생들의 LGBT 인식을 들여다보고자, 모교에서 교류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질적 연구를 진행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곧장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왜 에든버러로 오게 됐죠?”. 순간 그 친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치며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혹스러움과 긴장감은 그 친구만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나의 당혹스러움이요 긴장감이기도 했다. 

첫 번째는, 유학생의 숙명과 같은 조건반사적인 의구심이었다. 도대체 저 질문의 의도는 무엇인가 “어째서 ‘중국’ 국적을 가진 연구자가 ‘영국’의 학교로 진학하여 ‘미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는지”를 따져 묻기라도 하는 것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나는 부조리함에 대해서라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고 언제든 논쟁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학과 교실에 앉아있었다. 무엇보다 그 질문을 던진 교수님 역시 타국 출신으로서 영국의 학계에서 비영국사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가 아니던가. 두 번째는, 질문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스스로 끊임없이 되물었던, 하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답변을 찾지 못했던 바로 그 질문을 다시금 마주했을 때의 긴장감이었다. 한국 사회 바깥에서 한국의 사회변동을 이야기하는 한국인 연구자, 그것은 현재의 나였고, 나는 누가 요구하건 요구하지 않건 해명이 필요했다. 

그간 연구자로서의 ‘나’를 규정함에 있어 ‘국가’가 부여하는 정체성은 가장 후순위였다. ‘계급’과 ‘젠더’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 ‘국가’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물론,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 포섭된 한국의 자본주의가 있고, 그 내부에 사회운동연구자인 나를 위치 지을 수는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 선을 넘어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지난 3년의 경험은 한동안 덮어놓았던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한국인 연구자’라는 이름표를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들춰보게 했다. ‘내 나라를 떠나니 애국자가 된다’ 따위의 민족주의적 감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는 개인으로서, 또 연구자로서, 나를 구성해온 ‘한국사회’라는 구조의 효과를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자기성찰적 과정이었다. 이는 동시에 나의 연구에 맥락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미지=픽사베이

한국사회의 경계를 넘어선 이곳에서 촛불집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촛불을 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단순히 ‘Candlelight Vigil’이라는 번역어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킬 수 없다. 영국 사회의 맥락에서 ‘Candlelight Vigil’이란 정치적 행위로서의 집회라기보다는 추모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촛불집회가 어떤 경로로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소하게는 서울역에서 시청 앞 광장, 광화문 사거리로 이어지는 서울 시내 도시 지형부터 더욱 광범위하게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더불어 한국의 시민사회가 형성되어온 과정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면면을 면밀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나의 개인적 경험은 물론, 한국 사회 내에서 이미 축적되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논의가 진행 중인 담론 및 연구에 기대지 않고서는 달성할 수 없는 과업이다. 따라서, 현재 물리적으로 ‘바깥에’ 있을지언정, 사회의 구성물로서의 나는 이미 한국사회 ‘내부에’ 위치한 ‘한국인 연구자’임을 다시금 되새긴다. 그렇게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사회와 ‘거리 두지 않기’를 수행하고자 한다.

 

 

 

 

안지은 에든버러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영국 에든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사회운동론과 정치사회학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한국의 촛불집회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