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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기: 노동운동가에서 CEO 총장으로
인터뷰 후기: 노동운동가에서 CEO 총장으로
  • 이민선 기자
  • 승인 2004.08.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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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내면화된 '민주'


“이 시대가 피할 수 없는 무한경쟁시대인데, 비경쟁적 소신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이런 거대 조직의 운영책임을 맡게 돼 지금도 고민스럽습니다.”

인터뷰 들머리에서 2년 동안의 총장생활 소감을 묻자 신인령 총장은 뜻밖의 대답을 내놨다. 대학 총장에게 CEO로서의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준비되지 않은’ 자신이 중책을 맡게 돼 곤혹스럽다는 이야기였다. 기껏해야 누구나 돌려가며 맡는 법과대학장 정도까지가 자신의 능력 범위란다. 총장은 영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투다.


신 총장의 이력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노동계급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대학시절 신 총장은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기관인 ‘크리스챤 아카데미’에 들어가 노동분과 간사를 맡았고,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조민주화 교육을 했다. 교육내용이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심어주는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교육받은 이들은 각 사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거나 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등 민주화의 씨앗이 됐다. 이로 인해 신 총장은 정부의 요시찰 인물이 됐고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1985년 법학과 교수로 채용된 이후에는 학문을 통한 사회 실천에 주력했다. 노동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 속에서 연구 주제를 찾아 글을 썼다. ‘여성, 노동, 법’, ‘노동인권과 노동법’ 등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삶의 흔적 때문에 신 총장이 총장 역할을 과연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인터뷰 초반 신 총장이 털어 놓았던 ‘고민’은 총장직 수행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 요소가 아니었고, 오히려 대학 운영에 도움이 되는 듯했다.

실제로 신 총장 개인의 역사는 이화여대 총장직 수행하는 데 있어 실보다는 득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혼학칙 폐지. 57년 동안 이화여대의 ‘전통’으로 지켜져 온 금혼학칙은 외부인의 눈에는 전근대적인 성격이 짙게 배인, 당장 폐지돼야 할 학칙이었다. 신 총장 역시 금혼학칙의 부당함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었던 문제.


하지만 신 총장은 금혼학칙 폐지를 급격한 방식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두 학기 이상 학내 구성원과 동창생들에게 합리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여론을 환기시키며, 끈질기게 합의점을 만들어갔다. 독선적인 방식으로 추진했더라면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결국 동문회 뿐 만 아니라 재단 이사들로부터도 찬성을 얻어내 ‘전격적으로’ 금혼학칙을 폐지했다.

 
총장 취임 전 다양한 그룹의 학내 구성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의견 수렴을 한 것 역시 신 총장 운영 스타일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아래로부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의견을 수렴해, 이화號 공동의 목표를 설정해 나갔다. 신 총장 삶에 내면화된 ‘민주’라는 두 글자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지난해 9월에 설립된 ‘이화리더십개발원’은 한국 사회에서 이화여대의 역할을 한 단계 높이는 것으로서, 신 총장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인터뷰에서 속내를 밝혔듯, 이화리더십개발원 설치는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시절 여성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문에 좌절돼 대학의 인프라를 통해 다시 한번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 17대 여성 국회의원들 대상으로 개원 전 오리엔테이션을 개최했고, 여성 언론인들이 자신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설을 요청할 정도로 성과가 좋다.

‘준비되지 않은’ 총장이라며 겸손의 말을 거듭했던 신인령 총장. 사실은 지난 40년 이상 ‘준비된’ 총장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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