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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7] 점점이 찍힌 색채처럼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을 위하여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7] 점점이 찍힌 색채처럼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을 위하여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3.22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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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시냐크
폴 시냐크(1863–1935)
폴 시냐크(1863–1935)

 

지금부터 1세기 전인 1886년, 인상파 최후의 전시회(제8회)가 파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우리에게 인상파 대가들로 알려진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 등은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한 화가들은 고갱, 르동, 피사로, 쇠라, 시냐크 등이어서 마지막 인상파전은 인상파의 발전적 해소로서의 상징주의와 ‘신인상파’ 그리고 ‘후기 인상파’의 대두를 의미했다. 조르쥬 피에르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91)와 폴 시냐크(Paul Signag, 1863-1935)가 대표격인 신인상파는 날카로운 필치로 채색하면서 최신의 광학이론에 합치되도록 색채를 주의 깊게 선택하고 배열하여 인상파의 색조분할을 유지했다. 한편 후기 인상파는 개인적인 정감과 인식을 표현하는 시도로서 자연의 색채와 형태를 왜곡해 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상파가 벗한 부르주아 계층으로부터 소외된 점에서 공통되었다. 그리하여 모두 하층 민중을 예찬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노동자에 대한 선(善)은 미술가에게도 선이라고 느꼈다. 이는 19세기말의 자본주의가 그 모순을 극대화한 것의 반영이었다. 그들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이론가들, 특히 신문기자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말에는 문제가 있다. ‘후기 인상파’라는 말은 1910년 영국의 로져 프라이가 ‘마네와 인상파 이후’(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m)라는 전람회에서 붙인 말이었다. 그곳에는 세잔, 반 고흐, 고갱은 물론 쇠라, 시냐크와 마티스, 피카소, 드랭, 마르케, 루오, 블라맹크 등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곧 그것은 인상파 이후의 현대미술을 지칭한 것으로서 사실상 인상주의를 거부하는 것들이었다. 아나키스트 미술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이 만든 신인상파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이루어진 산업자본주의의 폭발적인 팽창과 그에 따른 장인과 소작농의 급격한 몰락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신인상파는 과학적인 채색 방법 외에 아나키즘적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그들은 산업화로 인한 부의 양극화와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은 노동자 편에 서서 신흥 자본주의가 사회의 자연스런 조화를 파괴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신인상파가 캔버스 위에 점처럼 찍은 낱낱의 색채들은 단 한 명의 인간도 다른 인간 위에 서서는 안 된다는 아나키즘들의 평등주의를 반영했다. 각각의 점은 인간 각자처럼 그 자체로 완전히 자유로운 개체이면서 멀리서 보면 서로 섞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자유 속의 조화’라는 공존의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점묘법만큼이나 혁신적이었던 신인상파의 정치관

 

마지막 인상파전에 출품된 쇠라의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의 대작으로서 노동자, 창녀, 중산층, 군인 등 당대의 다양한 군중이 부자연스럽게 서로 고립되어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동자 계급과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 강변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는 것을 작은 붓질로 그린 작은 점의 체계적인 방법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사회 계급에 상관없이 인류는 평등하다는 평등주의를 반영한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그 그림은 주제보다도 기법으로 더욱 유명하다. 당시 27세였던 라가 지금까지의 경험적이고 직관적인 빛의 세계를 그린 자연주의적 인상파를 벗어나 색점의 규칙적인 배열에 의한 ‘분할’의 방법에 의해 형태, 빛, 색채의 균형과 조화를 도모하고, 과학적으로 견고한 구도 속에서도 서정을 담은 새로운 그림이었다. 그것은 인상파의 애매한 빛의 미학에 엄밀한 과학성과 명석한 논리성을 부여한 혁신적인 조형 표현으로서 그 후에 전개된 현대회화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인상파로부터 입체파, 광선파, 미래파가 비롯된다.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6)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6)

 

신인상파의 점묘법이란 간단한 것이다. 언제나 순수한 원색만을 사용하는 신인상파는 색을 섞지 않고, 즉 어떤 중간색을 표현하고자 하면 원색을 미리 섞어 화면에 칠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원색을 나란히 칠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섞은 색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점묘법이란 원색의 나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색채를 혼합하는 경우, 그 선명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인상파는 색채의 완벽한 과학화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나 신인상파는 단순히 점묘법의 기술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혁신적이었다. 당대의 급진적 유행사상은 아나키즘이었다.

 

앙드레 지드와 반파시스트 전선에 서다

 

젊은 나이에 죽은 쇠라는 정치적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시냐크를 비롯한 신인상파는 아나키즘 잡지에 그림을 기고하는 등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888년에 아나키즘 이론가들인 르클뤼와 크로포트킨 등의 책을 읽은 시냐크는 “아나키스트 화가는 아나키스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보상에 대한 욕구 없이 개인적인 기여를 통해 공식 부르주아의 관습에 맞서 자신의 개성으로 싸우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시냐크는 야수파와 표현파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크로포트킨 등이 전쟁을 지지하자 국제주의자인 그는 실망하여 3년간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로맹 롤랑 등과 함께 평화활동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터진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면서 브르타뉴, 노르망디, 대서양 연안 및 코르시카의 풍경으로 새롭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를 허용한 독립 예술가 살롱의 회장을 지냈고 죽기 1년 전에는 앙드레 지드와 같은 예술가들과 작가들과 함께 반파시스트 지식인 활동을 했다.

신인상파는 인상파와 같이 시민생활을 소재로 취급했으나 그들의 시각은 찬양이 아니라 빈정거림이었다. 또한 그러한 시민생활보다도 노동자들의 생활을 더욱 즐겨 그렸다. 그러한 두 가지 주제의 그림에 의해 그들은 노사간의 거대한 사회투쟁을 증언하고자 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적어도 그들의 점묘법 그림을 통해서 보는 한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시냐크는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곳을 그리기도 했으나 그러한 그림들을 사회투쟁의 증언으로 보기는 어렵다. 피사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남부의 시골에서 살다가 지중해 해안으로 이주하여 조화로운 공동체를 묘사했다. 이는 쇠라의 위 그림에 대응되는 시냐크의 「조화의 시대에: 황금시대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1893-95)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도 반대되는 두 계급의 공존이 조화를 이루는 전원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쇠라의 작품 속에 나오는 원숭이는 시냐크의 경우 두 마리의 닭으로 변형되지만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보여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시냐크의 인물들은 쇠라의 딱딱하고 정적인 인물들과 달리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또한 쇠라의 그림 속에는 없는 인물들 사이의 친밀감도 두드러진다.

 

「조화의 시대에: 황금시대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1893-95)
「조화의 시대에: 황금시대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1893-95)

 

색채와 광채의 과학적 평등론

 

인상파가 주장한 색채와 광채의 과학적 평등론을 더욱 발전시킨 공적 외에 신인상파에 대해 어떤 평가가 있을 수 있을까? 물론 화면을 운율과 같이 조직한 공로나 과학적인 새로운 질서와 법칙을 세운 점, 문학성이나 설명적 부분을 배제한 점에 그들의 공적은 인정되나 그것은 분석주의에 자극된 일종의 형식주의에 그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네 이래 시도된 빛의 교향악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림은 그 소리 하나하나를 하나의 색으로 분해하여 화면에 재조직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냐크의 아나키즘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과거와 같이 오랜 수련에 의해 화가가 되는 것과 달리, 이제는 과학적 분석과 조작에 의해 일정한 미술의 법칙에 따른다면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미술을 전환시키는 것은, 미술을 일부 특권자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시냐크의 분석적 방법론은 그러한 의도에서 비롯된다. 근대합리주의는 신인상파에 의해 비로소 나름의 예술이론을 낳게 된다.

쇠라는 색채의 재조직을 주장하는 시냐크를 넘어서서 형체의 재조직까지 주장했다. 곧 색채가 정리될 수 있는 이상 자연의 복잡한 형체도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후 추상예술에 일대 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인상파의 주장은 미술이란 과학에 의해서만 만인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을 하자는 주장으로 볼 수도 있다. 기술의 평등주의는 현대과학이 과시하는 점이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사회의 실질적인 평등을 결과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점묘법의 신인상파도 그것을 표방했으나, 실제로 그것이 미술의 민주화나 평등화에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도리어 현대미술의 더욱 과도한 전문화를 결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과학이 그러하듯이.

한국에서도 한때 신인상파류의 점묘법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나키즘이나 예술의 평등화나 만인화와 같은 사상적 토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장식적인 미술기법의 하나로 소개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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