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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6] “진정한 예술은 모두 무정부주의입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6] “진정한 예술은 모두 무정부주의입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3.1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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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피사로
카미유 피사로(1830~1903)
카미유 피사로(1830-1903)

 

일본이 소위 명치유신 이후 서구화를 도모하던 시절의 서구 미술의 주류가 인상파였던 탓으로 일본 근대 회화는 인상파로 비롯되었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식민지 시절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초등학교, 중고교는 물론 대학에 이르기까지 미술교육의 중요한 전통이 되고 있는 그것은 명암과 색채의 구분을 기본으로 한 교육부 미술정책의 기본으로도 되어 왔다. 한마디로 한국의 미술은 일제 이후 인상파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정책과도 연관되어 일반시민들의 취향도 상당히 인상파적이다. 가정이나 회사 또는 호텔이나 식당 등에 걸리는 달력이나 화보 또는 모조화나 삽화에는 쁘띠부르주아의 생활을 예찬하는 르누아르나 드가의 그림, 마네나 모네 그림 등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는 일제 이후 우리가 지향한 자본주의식 근대화와도 관련된다. 동상조각이나 민족역사화 등의 아카데미즘 경향과는 별도로 시민생활 예찬의 조악한 감각주의적인 부르주아 취미가 형성되어 왔다.

물론 인상파의 감각성 자체를 퇴폐적인 부르주아 취미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 인상파는 순간과 변화 그리고 우연의 우위를 주장했다. 예술적 표현을 순간적 기분에 귀속시킴은 인생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 방관자적인 입장, 심미주의적(유미주의적) 태도를 동시에 보여준다. 낭만주의적 체념의 극한적인 귀결을 보여주는 그것은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 ‘현실 무시의 예술’로 오해되는 한국적 경향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본래 낭만주의에서 유래된 자유를 위한 하나의 투쟁수단이지 현실도피나 예술유희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곧 고전적 예술규범에 대한 반항, 외부적 제약에 대한 저항, 모든 비예술적 가치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부르주아 가치관으로부터의 독립, 공리적 목표에 대한 무관심을 뜻했다. 물론 실제로 그것은 기성 질서의 묵인인 점에서 근본적인 변화라고는 할 수 없었다.

 

‘체제 순응적인 예술’ 낭만주의에 대한 오해

 

그런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체제에 봉사하는 정치적 예술로 와전되고, 예술에 현실의 의미를 반영해서는 안 되는 예술절대주의로 곡해되어 문제다. 곧 민중적 고뇌를 예술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부정하는 보수적 미학이론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그것이 주장된다. 서구에서도 그것이 산업발전에 따른 분업화의 표현이고 산업화에 대한 미술의 자기방어로 주장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예술의 비민중화와 정치화 내지 어용화를 위한 기술로 사용된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 1830-1903)는 민중적 고뇌를 그린 점에서 특이한 존재다. 그가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출품한 인상파의 전시회는 1886년의 8회 전시회로 막을 내렸다. 인상파전이 끝난 이유는 피사로가 신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을 소개한 결과 인상파가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만년의 피사로는 신인상파의 점묘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자연적인 감정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그리고 만년에는 맹인이 되어 고통스럽게 살았다. 맹인이 된 화가로는 그와 드가가 있다.

 

'잡담 중인 해변의 두 여인(세인트 토마스, 1856)'
'잡담 중인 해변의 두 여인'(세인트 토마스, 1856)

 

피사로는 탄생부터 고통이었다. 버림받은 가난한 포르투갈계 유태인의 아들로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나 흑인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자랐다. 24세에 파리에 정착하기까지 오랜 방랑생활을 했고, 그후에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나키즘에 심취했고 그래서 위험한 혁명가로 불렸다. 인상파화가 중에서 피사로만큼 정치적인 입장을 분명히 밝힌 사람도 다시없다. 대부분의 인상파화가는 비정치적이었다. 반면 신인상파의 쇠라나 시냐크는 아나키스트였다. 흔히 후기인상파로 불리는 반 고흐, 고갱, 세잔, 뚤루즈-로트렉 등은 아나키스트라고 못 박을 수는 없지만 다분히 일상적인 노동계급을 묘사한 민중지향적인 점에서 아나키즘에 가까웠다.

 

“가장 타락한 예술은 감상적인 예술이다”

 

인상파 중에서는 피사로가 유일하게 당시의 가난한 민중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점에서 그는 후기인상파와 동일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보다는 시골을, 중산층보다는 농민을 즐겨 그린 그는 처음부터 대지를 사랑했고 농민의 생활이 그대로 배어나는 풍경을 그렸다. 모네의 인물은 풍경에 젖어 드는 빛 속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피사로의 인물은 언제나 풍경의 본질을 구성했다. 그 후 인물은 점점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말했다. “가장 타락한 형태의 예술은 감상적인 예술, 창백한 여인을 기절하게 하는 오렌지꽃 같은 예술이다.” 진정한 예술적 자유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이 부유한 자본가들의 후원에서 벗어나야한다고 확신한 그는 노동자와 농민, 하인과 하녀 등의 하층계급을 인간적이고 존엄한 존재로 묘사했다.

그가 즐겨 그린 농가의 정경에 등장하는 찬란한 초록빛 속 일상의 순박한 농부들은 밀레와 같이 일하는 농부가 아니라 일을 마치고 쉬는 모습이다. 밀레의 농부는 다분히 종교적이지만 피사로는 이미 종교를 포기한다. 그는 외광과 자연 그 자체 속에 인물을 배치한다. 피사로는 모네가 빛의 열광 속에서 찬란한 색조의 그림을 그린 것과 달리 객관적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보이고자 한다.

 

'소년의 초상(1852-55)'
'소년의 초상'(1852-55)

 

1880년대에 피사로는 크로포트킨이 편집한 『반역자(La Révolte)』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신문 잡지를 구독하고 그 편집에 참여했으며 아나키스트가 쓴 책들을 숙독하고 그들과 토론했다. 피사로는 혁명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이었고 폭력혁명 노선을 선호하지 않았다. 또한 아나키즘을 정부의 파괴로 보지 않고 평등주의 사회의 창조로 보았다. 미래 세대를 신중하게 교육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도록 고무함으로써 아나키즘 사회가 구축 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그러한 원칙을 가족생활에도 적용했다. 피사로는 여성과 어린이가 남성만큼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 모두를 동등하게 대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어머니 집의 하녀와 결혼했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정치 이론, 특히 아나키즘을 연구하도록 장려했으며, 정기적으로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가족과 정치 토론을 했다.

 

자본주의에 상처 입은 인민의 풍속을 화폭에 담다

 

화가는 작품을 팔지 않고 물물 교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1889년에 두 명의 조카에게 자본주의의 악에 대해 교육하기 위해 자살, 기아, 부패의 이미지를 포함하는 「파렴치한 사회(Turpitudes sociales)」라는 제목의 펜화 서른 장을 그렸다. 자선사업에 헌신하는 부르주아 부인들의 봉사 정신에 분노한 그가 원한 것은 빈민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스스로 쟁취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버려진 여성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여성을 비롯하여 ‘황금송아지의 궁전’ ‘검은 모자를 쓴 비참’ 등의 제목들로 돈을 위해 결혼하는 사람들, 자본의 부패, 노동자 착취와 같은 시회악을 묘사하다가 진압 당하게 될 ‘봉기’에 대한 묘사로 끝을 맺는 그림들은 긁힌 상처처럼 거친 선과 펜 끝으로 묘사한 음영을 통해, ‘불쌍한 사람들’(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을 보여준다.

'파렴치한 사회(Turpitudes sociales)'(1889) 중에서
'파렴치한 사회(Turpitudes sociales)'(1889) 중에서

 

1972년에 와서야 공개된 그 그림들은 그 앞 시대의 고야나 도미에가 그린 판화들이나 그 뒤의 표현파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을 연상하게 한다. 피사로가 그 그림들을 그린 시기는 파리코뮌에 가해진 탄압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던 때였다. 뒤에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에 영감을 준 1880년 파업을 비롯하여 루이즈 미셸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파업이 끊이지 않으면서 프루동, 마르크스,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 아나키스트들의 사회개혁 이론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최근에야 공개된 그 그림들은 인상파나 후기인상파에 대한 종래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미 20년 전쯤부터 빈센트 반 고흐의 아나키즘적 성격에 대해 책을 썼고, 고야와 도미에 대해서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사회적 의미를 찾는 책을 썼지만, 미술과 사회에 연관성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낮은 또는 잘못된 한국에서는 여전히 읽히지 못하고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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