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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태국 밀레니얼의 외침 “우리에게 왕은 필요없다”
[글로컬 오디세이] 태국 밀레니얼의 외침 “우리에게 왕은 필요없다”
  • 현시내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21.03.16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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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서강대 동아연구소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이 말은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방화(Localization)의 합성어다. 세계 각 지역 이슈와 동향을 우리의 시선으로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국내 유수의 해외지역학 연구소 전문가의 통찰을 매주 싣는다. 세계를 읽는 작은 균형추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난해 10월 25일 반정부시위에 참가해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는 태국인 LGBT 민주화 활동가. 사진=EPA/연합
지난해 10월 25일 반정부시위에 참가해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는 태국인 LGBT 민주화 활동가. 사진=EPA/연합

 

태국 정치사상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탁신 치나왓 총리가 2006년에 군부 쿠데타로 쫓겨났다. 탁신 지지자들이 주도해 벌였던 2010년의 민주화 운동은 4개월 만에 무너졌다. 이듬해 탁신의 여동생이 막대한 지지와 표를 받고 총리가 되었지만 결국 2014년 군부는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군부정부의 폭주를 막기 위해 2018년 3월에 젊은 정치학자와 비즈니스맨이 주도하여 미래 전진당(팍 아나콧 마이)을 창설하고 다수의 표를 얻어 수많은 국회의원을 배출했지만, 이도 2020년 2월에 강제로 해산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거리로 나왔다. 그들의 요구는 총리퇴진(Resignation), 헌법개정(Revision), 그리고 왕정개혁(Reform) 세 가지다. 왜 갑자기 코로나 정국에 어린 학생들은 7년간 이어진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239년 동안 이어진 짜끄리 왕조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일까? 

 

세대의 틈 파고든 ‘왕실 개혁’

 

2020년 태국의 학생 주도 민주화 운동세력은 왕정개혁을 요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주제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는 정서가 훨씬 더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직접적으로 ‘철폐’ 혹은 ‘종식’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최고 15년형까지 내릴 수 있는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악명 높은 왕실모독죄가 건재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 개혁’이 시민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요구된 것은 1932년 절대왕정폐지 이후 처음이다. 이 요구가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현 국왕이 대중뿐 아니라 군부 내에서도 인기가 없다는 점을 밀레니얼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그의 여성 편력과 독일에서의 방탕한 사생활은 일부일처제의 윤리를 강조하고 건전한 가장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려 했던 그의 아버지의 명성까지도 위협했다. 탁신 총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현 국왕의 아버지였던 푸미폰 왕의 대중적 인기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밀레니얼 세대에게 왕실의 의미는 다르다. 우리나라 태극기 부대와 촛불혁명세대의 간극만큼이나 태국에서 ‘왕이 나라를 구했다’고 믿는 냉전세대와 ‘금수저를 갖고 태어나서도 왕궁 하나 지키지 못하고 있는 국왕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밀레니얼 사이 간극은 전 국왕이 2016년 서거하기 전부터 커져 왔다.

 

지난해 10월 20일 방콕에서 민주화 집회에 참가한 태국시민들. 사진=AP/연합
지난해 10월 20일 방콕에서 민주화 집회에 참가한 태국시민들. 사진=AP/연합

 

두 번째로 태국의 밀레니얼 세대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욕망이 강하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세계의 ‘밈(meme)’ 문화를 빠르게 공유하고 소비한다. 이러한 현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왕실모독죄의 공이 크다. 2006년 이후 왕실모독죄는 한층 더 광범위하고 일관성 없이 적용되어 태국인뿐만이 아니라 외국인에게까지도 자기 검열을 강요해왔다. 이는 오히려 정치풍자문화의 확장과 다양화로 이어져 밈 문화가 빠르게 정착하는 데 기여했다. 태국정부가 디지털 정보 관련법을 여러 번 개정했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반정부세력과 그들의 정치풍자는 지속적으로 확장돼왔다. 태국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세손가락’도 2014년 쿠데타 직후 밀레니얼 세대들의 시위현장에서 등장하여 지금은 미얀마 반정부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태국·홍콩·대만 청년들의 밀크티 동맹

 

마지막으로 2020년에 태국 밀레니얼 세대가 주도하는 ‘밀크티 동맹’이 전면에 등장했다. 중국제일주의로 무장한 중국 네티즌의 이른바 ‘트롤링’에 대항하여 형성된 이 온라인 연대는 지금은 태국의 학생운동 리더들과 홍콩, 대만 등지의 청년운동가들이 온오프라인으로 연대하며 서로의 민주화운동을 격려하고 전략을 공유하는 반독재주의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이 네트워크는 태국에서 혹은 미얀마에서 반정부시위대가 폭력진압에 무너진다고 하여도 그들을 대신하여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저항한다. 미얀마에서 2월 1일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태국의 청년들이 유엔 방콕지부 앞으로 달려가 시위를 벌인 이유다. 밀크티 동맹은 이제 동아시아의 정치지형을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다.

태국왕실에 대한 개혁요구는 판도라의 상자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포스트 코로나가 그 이전과 같아질 수 없듯이 이미 선을 넘어 버린 태국의 민주화 운동가들, 특히 밀레니얼 세대들에 의한 왕정개혁, 독재철폐 요구는 더 거세질 것이고 저항의 방법도 더 다양해질 것이다. 2010년의 민주화운동의 한계였던 정치정당 중심, 정치인 영웅화를 벗어나 리더가 없는 자율적인 오프라인 모임, 그리고 온라인에서의 대중화 운동의 확산을 통해 이들은, 오늘도 군부독재의 종식을 위해 싸우고 있다.

 


 

 

현시내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으로 석사,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위스콘신주립대-화이트와터에서 조교수를 지냈다. 태국의 냉전시기 정치사와 국경지대의 소수민족문제, 미국의 냉전기 대동남아 정책을 연구해왔고 관련 저서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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