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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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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21.03.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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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음 | 나름북스 | 278쪽

애도하고, 치유하고, 도약하다
과로 권하는 사회에서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말하기
다음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극복하고 나아가기를 바라는 연대의 기록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했다”
과로로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토록 절실한 이야기

현대 한국사회가 건강한 삶과 ‘워라밸’을 외친다지만, 지치고 아파도 근면 성실하게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여전히 미덕으로 통한다. ‘열심히 일하다 죽은’ 사건이 연일 보도되는데 ‘일 중독’과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경쟁력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이 와중에 과중한 일 때문에 죽음을 맞는 사람은 점점 늘고,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과로사와 과로자살 사건 뒤에는 알지 못했던 세계에 내던져진 유족들이 있다. 갑작스럽게 닥친 가족의 과로죽음은 남은 사람들을 다양한 종류의 고통으로 몰아넣었지만, 이들은 과로 때문에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나아가 더는 이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한고비 한고비를 돌파해 왔다.

자조모임을 꾸려 서로 의지하고 도운 유가족들은 이 책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사례를 직접 썼다. 모임 내에서 심리 치료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얻은 이야기, 떠올리기 어려웠던 사건 당일부터 산재 신청 과정 등 다양하게 휘몰아치는 감정과 사건들을 재구성했다. 지원을 위해 유가족모임에 참여 중인 법률 전문가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글을 보탰다. 모임에서 만난 유족들은 가족의 과로사, 과로자살 이후 남겨진 사람의 상태가 매우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 조사에서의 곤경과 장례 절차, 과로사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와의 갈등,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절차와 방법 등에 관해 도움을 얻거나 물어볼 곳이 전혀 없었다는 점까지 공감한 이들은 홀로 힘겨워할 다른 유가족을 돕기 위해 자신들이 겪은 모든 절차와 심경을 책에 담았다.

평온하던 일상에 과로사, 과로자살이라는 암초를 만난 유가족은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허둥지둥하고 나면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거나 가족을 탓하는 주위 사람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또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고성 재해와 달리 죽음 이후에 업무 관련성을 증명해야 하는 과로사, 과로자살의 특성상 유가족들은 이를 입증해야 하는 기나긴 시련에 놓인다. 그러나 과로사와 과로자살은 개인의 나약함 때문에, 가족이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니며 과로 권하는 사회가 빚은 사회적 죽음이다. 그래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남겨진 이들의 울분을 자세히 밝히고 개선 방향을 제시해 과로죽음 이후 처리해야 하는 절차와 과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과로사와 과로자살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도 이 책에 담겼다. 지은이들은 “다시는 과로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비슷한 일을 겪게 될 유가족, 동료, 친구들이 있다면 우리보다는 덜 분노하기를 바라며, 조금 더 존중받기를 바라며 이 책을 내놓는다”라고 밝혔다.

경찰 조사부터 부검, 산재 보상과 소송까지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거의 모든 조언

과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부터 죽음 이후의 절차, 산업재해보상보험 신청과 판정까지 과로사, 과로자살에 관한 현실적 대처를 망라한 이 책은 앞서 이 모든 과정을 겪은 유가족들이 하고 싶은 말과 현재의 심경까지를 포함해 구체적인 조언과 증언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과로의 정의와 과로사, 과로자살의 규모를 다룬 후 과로사와 과로자살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때 기준이 되는 법률의 해당 부분을 싣고 해설했다. 2장에서는 과로사 혹은 과로자살 소식을 접한 직후 유가족들이 겪은 상황과 마음을 솔직하게 정리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경찰 조사, 부검, 장례를 치르며 기력을 소진하고, 절망과 상실감은 물론 죄책감이나 고인에 대한 원망까지 생겨 혼란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사망 신고, 재산 조회, 연금과 보험, 상속, 긴급복지제도 등을 안내했다.

아울러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진정으로 고인을 애도할 수 있고 그것이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격려한다. 그래서 3장에서는 산업재해보상보험 신청과 승인 과정을 자세히 다룬다. 가족이 일 때문에 죽었다는 걸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좌절하며 고인의 일과 삶을 되짚는 유족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회사에 대응하는 법, 언론과 여론 상대하기, 노무사나 변호사 선임하기,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만나기 등의 경험을 나누며 산재 신청 방법과 자료 수집, 근로복지공단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사 과정, 산재 승인되었을 때와 불승인되었을 때 각각의 대처를 수록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과로 때문이었음을 인정받는 것은 유가족뿐만 아니라 남은 동료들에게도,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가 일했던 일터가 한 사람을 파괴할 정도의 문제가 있었다는 말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유가족들은 일터에 남겨진 동료들과도 암담한 마음을 나누기 위해 과로사나 과로자살이 발생한 일터 사례를 직접 찾아 인터뷰했다. 4장에 드러난 게임회사 직원이나 병원 간호사의 과로죽음 사건은 과로의 메커니즘과 폭력적인 기업 시스템, 과로죽음을 양산하는 사회 구조를 재차 확인시킨다. 남겨진 동료들은 회사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직접 행동에 나서는 등 크고 작은 연대로 변화를 강구하고 있었다.

“과로를 멈춰야 한다”는 유가족들의 선명한 주장은 우리 사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다. 5장에서는 과로사, 과로자살을 줄이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야간노동을 최소화하며, 기업 문화의 변화와 정부 규제가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목소리 낼 수 있도록 노동자들이 힘을 키우고 과로의 위험성, 노동권을 교육해야 한다는 희망을 담았다.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사라진 유족들에게 긴급한 경제적 지원과 심리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 행정 절차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도 서술했다. 특히 오로지 유가족 개인에게 부여된 과로죽음 입증의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험에서 도출된 문제 제기다. 소극적인 기관들 사이에서 ‘알아서’ 증거를 찾아다녀야 했던 막막했던 기억은 전반적으로 산업재해자 당사자에게 입증 책임을 무겁게 지우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꼬집는다.

산재를 승인받아도 그렇지 못해도 유가족들에게는 살아남아 잘 치유하는 과정이 남았다. 6장에서는 올바른 끝맺음을 위해 심신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유가족들의 일상과 삶의 노력을 서술했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갑작스러운 암초를 딛고 당당히 인생을 재설계해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값진 변화다. 가족이 없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을 잘 영위하며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유가족들의 모습은 과로죽음 유가족은 물론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다.

“과로해서 죽을 수 있다, 우리가 증인이다”
과로 권하는 사회를 바꾸고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과로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과로사에 대한 정확한 조사나 통계도, 예방 대책도 없다.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 정식 사망 원인이 될 수 없는 ‘과로사’의 규모는 뇌출혈, 뇌경색, 심근경색 등 뇌심혈관질환 사망자 중 업무와의 관련성이 인정된, 즉 산업재해로 승인된 숫자로 짐작할 뿐이다. 뇌심혈관질환 사망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은 것은 2019년에 503명이었다. 업무상 재해로 승인되는 비율이 신청 건수의 절반도 되지 않으며,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않는 직업군, 자영업자와 특수고용노동자 등의 과로사는 포함되지 않으니 이보다 훨씬 많은 과로사가 매년 발생한다는 뜻이다.

과로자살의 경우 파악이 더 어렵다.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사망 사건이 업무상 재해로 근로복지공단에 신청, 승인된 수치를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2019년 기준 35건이 업무와 관련 있는 자살 사망으로 인정받았는데, 자살의 산업재해 신청 규모가 절대적으로 작은 상황에서 이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과로의 대표적인 양상이 장시간 노동이며 업무에 의한 심리적 부담은 평가하지 않으니 질적인 측면에서의 과로는 사각지대에 있다. 그래도 ‘과로자살’은 오늘날 ‘과중노동에 의한 자살’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 ‘업무로 인한 자살’, ‘업무와 관련된 자살’까지 통칭하게 되었다. 절대적인 장시간 노동이 없었더라도 일하다가, 일 때문에, 일터에서 주는 압박 때문에, 상사에게 받은 모멸감 때문에 발생한 자살은 모두 과로자살이다.

이 책에서는 과로사, 과로자살을 ‘장시간 노동 등 과중한 업무 부담 및 심리적 부담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일하는 사람의 사망 및 자살’로 정의하고, 이때 장시간 노동 등 과중한 업무 부담 및 심리적 부담을 ‘일하는 사람이 건강을 유지할 수 없고, 가족 및 사회생활을 원활히 유지할 수 없는 정도의 업무’로 정의한다. 건강을 해치고 목숨을 잃는 결과를 낳기 전이라도 가족생활을 양보해야 하거나 원하는 만큼의 사회생활, 취미생활,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이미 ‘과중한’ 업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계속해서 세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과로사’라는 용어가 익숙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 일본, 대만뿐이다. 노동자의 건강보다 죽을 때까지 일해서 성과를 내는 일을 더 중시한 결과다. 과로사, 과로자살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일본에서는 2014년 과로사방지법을 제정했고, 자살을 포함한 정신장애의 업무 관련성을 평가하기 위해 ‘업무에 의한 심리적 부하 평가표’도 마련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과로죽음 문제와 관련해 더 많은 공론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를 토대로 과로죽음을 실질적으로 막을 수 있는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고 저자들은 입을 모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생긴 관심인 ‘재난 참사 피해자의 권리’는 재난 참사 피해자가 권리의 주체임을 강조한다. 피해자를 참사와 관련된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할 주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건 사고에서 ‘살아나올 권리’부터 진실, 정의, 안전, 회복까지의 권리를 과로사, 과로자살 유가족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과로사, 과로자살 유가족은 특히 정의의 권리에 대한 욕구가 커진다. 재난 참사의 책임자가 간접적이고 폭넓은 데 비해 산업재해인 과로사나 과로자살은 명백한 사고 책임자가 있는 경우가 많고, 이런 구조를 방치한 채 회사를 경영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러니 피해자 및 가족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일터를 그대로 운영한 자들이 ‘사과’하고 그 죽음이 과로사, 과로자살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온전한 회복과 애도가 시작될 수 있다. 책임 있는 자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 정의와 회복의 권리에서 중추가 된다. 이 책이 과로죽음에 맞닥뜨린 가족, 동료, 친구들의 권리가 진정으로 바로 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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