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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5] “천사를 눈 앞에 데려 오면 내 그려 주겠소”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5] “천사를 눈 앞에 데려 오면 내 그려 주겠소”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3.0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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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

아나키스트로서 미술사에 남는 위대한 화가에 의해 꾸준하게 그림으로 남겨진 사람은 프루동이 유일하다. 브장송에 있는 그의 생가가 지금도 남아있지만, 기념관으로 보존되지 않고, 거기에 있는 초라한 동상 외에 그의 기념물은 프랑스 어디에도 없는 점에 비교하면 쿠르베가 프루동의 초상화를 남긴 것은 미술사나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이채롭다. 쿠르베는 프루동의 생존 중에 그린 「화가의 아틀리에」에도 프루동을 그려 넣었고, 프루동이 죽은 뒤 1865년에는 프루동의 초상화, 프루동과 아이들의 초상화, 프루동 아내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프루동의 임종 시에 그의 얼굴도 데생으로 그렸다. 프루동과 아이들 그림만 파리의 쁘티팔레미술관에 있고,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오르세미술관에 있다.

 

쿠르베가 그린 프루동과 그의 아이들(1865)
쿠르베가 그린 프루동과 그의 아이들(1865)

 

그 중에서도 「프루동과 아이들」은 1849년에 저서의 출판을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가 1853년에 석방된 직후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감옥에서 수감자로 입었던 농민 셔츠는 노동 계급의 기원과 정치적 투쟁에 대한 이중의 상징이다. 처음에는 프루동의 아내도 아이들 뒤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1866년 이후 다시 칠할 때 빈 의자만 그렸고, 그녀를 별도의 초상화로 다시 그렸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중해의 고도 중에 13세기에 대학이 세워졌을 정도로 유서 깊은 몽펠리에라고 하는 작은 도시가 있다. 스페인 쪽에 붙은 그곳에는 쿠르베의 「만남」을 비롯하여 들라크루아가 1848년에 그린 「보들레르의 초상」, 1853년에 그린 최초의 누드화인 「미역 감는 여인들」 등의 유명한 작품들을 소장한 파브르미술관이 있다. 1층이 도서관이고 2층이 미술관인 그곳은 전형적인 유럽 도시의 문화관인데, 우리의 시골에서도 이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고 한숨을 쉰 적이 있다.

 

젊은 리얼리스트, 프루동에 경외심을 품다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들라크루아가 다닌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사상가인 프루동과 문학가인 샹플뢰리에 공명하여 소외계층을 그리는 리얼리스트가 된다. 특히 프루동과는 같은 고향 출신으로서 그가 죽기 전 10여년을 함께 지냈고, 그의 사후 쿠르베는 그를 처음 알았던 1853년에는 프루동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그에게 경도되었다.

혁명은 예술제도도 변화시켰다. 고전파와 낭만파의 심사위원들이 독점했던 살롱전의 심사제도가 1848년 폐지되어 밀레와 루소 그리고 쿠르베의 작품이 전시된다. 쿠르베는 낭만주의에 반기를 들고 리얼리스트를 자칭한다. 리얼리즘이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을 그린다는 것이다.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낭만주의는 물론 고전주의도 거부한다. 리얼리즘이 자연을 추구한 경우 밀레는 성서를 기본으로 삼아 어느 정도의 정신적 전통을 계승하나 쿠르베는 철두철미하게 과학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에서는 일체의 감정적 요소가 제외되고 동정심이나 감상의 유발도 철저히 봉쇄되며 얼굴은 가려지고 개인의 개성은 무시된다. 하나의 그림은 삶의 객관적 단면이자 사회적 부정의의 측면으로만 묘사된다. 이러한 그의 특징은 「화가의 아틀리에」(1854-55)로 집대성된다.

「화가의 아틀리에」는 그야말로 어느 날 아틀리에의 풍경이다. 그곳에는 화가와 못생긴 모델, 그리고 서민들이 다수 등장한다. 오른쪽에는 그가 공명하는 프루동, 보들레르, 샹플뢰리, 부르아스 등과 함께 그의 그림을 사주는 고객들이 위치한다. 그리고 왼쪽에는 소시민, 노동자, 양치기, 밀렵꾼, 광대, 성직자, 소부르주아, 상인, 고리대금업자, 장의사, 매춘부들이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볼 수 있는 자유를 향한 여신과 화가의 숭고한 모습은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냥 견고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낭만주의를 등 돌려 민중을 바라보다

 

그 그림은 쿠르베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자 당대 전위화가의 일상을 유감없이 표현한다. 그는 농민 출신으로 언제나 농민으로서 행동했다. 순박하고 무식하며 서민적으로 살았다. 그 그림 속에서 그는 자신이 만난 모든 민중을 묘사한다. 그래서 그 부제가 ‘현실의 우의(愚意)’였다. 모든 사회계급이 교차하는 화폭의 중간에 고향을 그리는 화가 자신을 묘사한다. 화가는 살집 좋은 모델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다. 곧 전통적으로 모델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그것을 무시하는 화가이다. 게다가 그 모델도 우아한 이상적 미녀가 아니라 건강하고 골격이 두드러진 보통 여성이다. 할 일 없는 미술사가들은 그 모델이 진실을 상징하고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년은 천재의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천진난만한 눈의 상징이라고 말하나, 웃기는 소리이다. 그냥 그려진 여인과 소년일 뿐이다. 그냥 민중들이다.

쿠르베의 작품은 당시 그 비속성과 정신적 가치의 결여로 비난 받았다. 그러나 아틀리에의 그림은 서민의 모습을 아무런 꾸밈없이 표현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화가의 아틀리에」에 등장하는 누드 역시 비속하다거나 타락된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앙그르식의 관능에 대한 도덕적 항의이다. 그의 누드는 살아있다. 고상하게 치장된 비너스가 아니라 살아있는 보통의 육체이다. 이웃 여인의 벗은 모습이다.

 

화가의 아틀리에(1854-55)
화가의 아틀리에(1854-55)

 

쿠르베는 그러한 비속이 바로 노동계급의 생활감정이라고 믿었다. “행동하기 위하여 아는 것이 나의 사상이다. 우리 시대의 풍속과 사상을 표현하는 것,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 행동하는 것, 한마디로 오늘 살아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린다. 따라서 그는 주제주의가 아니라 자연주의적 입장에 선 즉물주의에 입각한다. 그는 실제로 그림을 통하여 현실을 직접 비판하고자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고야나 도미에와 같은 반체제화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한 그의 한계는 혁명이 끝나자 곧 드러났다.

혁명은 너무나도 일찍 끝났고 쿠르베의 리얼리즘도 끝났다. 이를 우리는 그의 후기작품들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혁명의 실패 후 그는 자연풍경과 사냥 및 사슴 그리고 육감적인 여인들을 그렸다. 이미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묘사된 비대한 몸집의 육감적인 여인상은 1860년대에 와서 고혹적이고 선정적인 육감의 여성으로 변질된다. 그것을 사회적인 인식 하에 도덕적 방탕을 비판한 그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그림들은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혁명이 실패한 자리에 정열의 재도 식어간다

 

쿠르베가 마지막으로 혁명아로서의 정열을 불태운 것은 파리코뮌 시절이었다. 그는 작품제작을 중단하고 예술가동맹의 회장, 코뮌위원, 시의원, 대중교육위원, 국립박물관의 총감독관 등의 여러 공직에서 일했다. 그러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기념주 파괴혐의로 3개월 형을 살았다. 그것은 그림과는 상관이 없는 정치적인 행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그 원주가 미적으로 무가치하고 정치적으로는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적 폭거에 기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리얼리즘이 담긴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리고 망명 중에 병들어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쿠르베의 후기 그림 때문에 그를 매도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 전의 그는 전통적 주제의식을 거부하고 모든 현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을 자유롭다고 선언했다. 그는 결코 어떤 체제나 이데올로기에 속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직 자유라는 체제의 인간이라고 선언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를 사회주의미술의 이상으로 보는 점에는 문제가 있다. 도리어 그는 과학주의에 입각한 서민적 리얼리스트였다. 그는 ‘땅 위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그린다고 하는 사명으로 살았다.

 

쿠르베(1860년대)
쿠르베(1860년대)

 

사회주의자들은 민중화가로서의 쿠르베를 그들의 이상으로 칭송한다. 그들은 도미에도 밀레도 비판하면서 오직 쿠르베를 높이 평가한다. 그 이유는 쿠르베 자신이 리얼리스트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를 자처했고 그의 객관적 묘사가 혁명 후 선전화의 기본모델이 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투쟁을 통한 회화혁명으로 주장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정설이나 쿠르베의 회화혁명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부여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쿠르베는 표현대상에 관심을 두고 표현방법은 무시한다. 리얼리즘의 새로운 방법은 마네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리고 마네의 시도는 이어져 현대미술에서 계속 시험되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현대회화의 양식적 변모에서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점에서 쿠르베는 들라크루아나 마네에 미칠 수는 없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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