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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의 박물관 여행]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힘
[박찬희의 박물관 여행]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힘
  • 박찬희
  • 승인 2021.03.05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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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연구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원군 집권기, 강화도 조약, 갑오개혁을 중요한 기점으로 잡는다. 대원군 집권기는 부국강병을 지향했다는 점을, 강화도 조약은 본격적으로 국제질서에 들어갔다는 점을, 갑오개혁은 신분제를 폐지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어떤 점을 중요시하는가에 따라 근대의 기점이 달라진다.

2020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실이 개편되었다. 주제는 대한민국의 역사이지만 그 전사인 근대로부터 전시가 시작된다. 개편되기 전에는 신미양요와 강화도 조약 관련 전시물이 첫머리에 놓였다. 반면 이번에는 민(民)의 성장을 중요시해 동학농민전쟁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였고 동학농민전쟁의 상징적인 인물인 전봉준 사진을 가장 앞에 놓았다.

 

동학혁명기념관. ⓒ박찬희
백산에서 본 풍경. ⓒ박찬희

동학농민전쟁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높은 비중답게 전국 여러 곳에 관련 전시 시설이 들어섰다. 이 가운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전투를 벌여 최초로 승리를 거둔 황토현에 자리 잡았다. 근처에는 동학농민전쟁을 이끈 전봉준 고택,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터, 농민 수탈의 온상이었던 고부관아,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여 세를 과시한 백산이 펼쳐졌다. 장소의 상징성뿐만 아니라 전시가 동학농민전쟁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기 적당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운영한다는 점에서 이곳이 대표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무명농민의 진혼 기념물. ⓒ박찬희

동학농민전쟁은 상설전시실 두 곳에 전시되었다. 1층에는 1전시실이, 2층에는 2전시실이 있다. 이밖에 기획전시실과 어린이 전시실이 마련되었다. 1층에서 먼저 만나는 중요 전시물은 ‘무명농민군의 진혼’이라는 사각형 기념물이다. 기념물 위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전쟁 관련 중요 인물의 사진이 걸렸다. 기념물 아래쪽에는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틈이 벌려졌다. 허리를 숙여 기념물 안으로 들어가면 유리거울에 반사된 수많은 불빛들을 만난다. 이 불빛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농민군들의 혼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관에 필요한 시설이 기념물이나 기념 공간이다. 이 시설은 전시 전반부나 후반부에 놓인다. 전반부에 놓일 때는 주로 앞부분에 놓여 관람객들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전시를 보면서 사건이나 인물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이끄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는 현재처럼 동학농민전쟁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기 전에 기념물을 먼저 보는 방식보다 전시를 모두 보고 난 후 들리도록 하는 방식이 좀더 인상적일 것 같다. 또한 기념물에 동학농민전쟁의 상징인 전봉준 뿐만 아니라 무명농민군을 떠올릴 수 있는 섬세한 장치가 함께 마련될 때 관람객들은 기념물이 담으려는 무명농민군의 진혼에 좀더 자연스럽게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상설전시실. ⓒ박찬희

근현대사 박물관은 이전 시기를 다루는 역사박물관에 비해 전시에 사용되는 글의 양이 상당히 많다. 이곳 역시 적지 않은 설명글들이 전시실을 빼곡하게 채웠다. 이 글의 큰 주제를 살펴보자면 19세기 조선과 자각하는 농민들, 동학농민혁명을 향하여,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무르익은 혁명의 희망, 폭풍우 몰아치는 조선 산하, 일본군에 가로 막힌 꿈, 끝나지 않는 함성, 농민들이 꿈꾼 세상 등이다.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경과, 결말, 현재의 의미를 살펴보는 순서다. 
설명글은 꼼꼼하고 자세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면 동학농민전쟁을 자세히 알겠지만 일반적인 관람객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 때문에 박물관 입구에 비치된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자료에 있는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짧은 글과 동학농민혁명일지를 먼저 읽는 편이 전시를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일지에 등장하는 지명과 전시실에 있는 고부군 지역 모형도를 같이 살펴보면 동학농민전쟁이 입체적으로 파악된다. 이 자료들을 읽은 후 전시를 보면 일견 복잡해 보이는 전시의 흐름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온다.

전시중인 사발통문(복제품). ⓒ박찬희

여러 전시물 가운데 놓치고 말고 봐야할 것을 꼽자면 먼저 사발통문을 들어야겠다. 사발통문은 전봉준의 사진과 함께 동학농민전쟁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당시 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록의 대부분은 동학농민군이 작성한 것이 아닌 상황에서 이 유물은 동학농민군의 지도부가 작성한 유일한 기록으로, 또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 기록으로 중요하다. 연구자들은 대부분 이 문서를 작성한 시점이 유물의 이름표에 있는 1893년 보다는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한다. 유물의 소장자는 이곳에 유물을 기탁했고 관람객은 아쉬운 대로 원본은 아니지만 전시실에서 복제품을 만날 수 있다(종이 유물은 보존 문제로 오랫동안 전시하기 어렵다).  

통문은 일종의 알림글이며 사발은 사발을 엎어놓고 참여한 사람의 명단을 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둥그렇게 이름을 쓰면 주모자가 누구인지 쉽사리 찾아낼 수 없다. 명단의 6시 방향 즈음에 전봉준의 이름이 보인다. 명단 왼쪽으로는 여러 시기에 걸쳐 일어난 일들이 연이어 기록되었다. 사발통문이 돌고 난후 민심의 상황과 나쁜 관리를 처단하고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올라가자는 내용이다. 이 유물을 보면서 자기 이름을 쓸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면 당시의 비장했던 분위기가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 이름은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고 아울러 다른 이들과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걸 뜻한다.

전시 말미에 마련된 설명글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하였고 학살이라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그렇다면 동학농민전쟁은 역사에서 무엇이었을까? ‘농민군이 바라던 세상’ 설명글을 요약하면 농민들은 조세가 공정하게 부과되고 신분 차별이 없고 임금은 절대 권력을 쥐지 않고 탐욕적인 외세(일본)가 물러가는 세상을 원했다. 1894년 농민들의 바람이 그랬다면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람은 무엇일까? 세상의 불합리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을까?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동학농민전쟁의 전개에 초점이 맞춰졌다. 때문에 다루지 못한 주제도 여럿이다. 평범한 동학농민군과 그들의 가족 이야기가 그렇다. 영웅이나 사건에 집중하다 보면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한편 동학농민전쟁의 평가 과정 또한 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다(2020년 이곳에서 평가의 역사를 조명한 ‘동학농민혁명, 기억과 기념의 역사’ 특별전이 열렸다). 어느날 한순간에 동학농민혁명으로 불린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동학란으로 불리며 농민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학군 위령제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1946년에야 처음 열렸다. 1954년에는 시신이 없는 전봉준의 허묘가 그가 살던 집 근처에 세워졌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보고 난 후 서둘러 나가지 말고 잠시 멈춰보자. 만약 전시 주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필자는 ‘자각하고 행동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농사를 짓던 일개 농민들이 사회의 문제를 구조적이며 근본적인 문제로 보기 시작했고 문제 해결의 주체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그들은 행동하는 농민군으로 변모하였다. 이때 수많은 농민군은 단지 숫자의 집합이 아니라 자각하고 행동하는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그만한 숫자를 이룬 것이다. 자각하기 시작한 존재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죽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였다.

 

박찬희 박물관 연구소 소장

 

이번 호로 '박찬희의 박물관 여행'의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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