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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의 발명
여권의 발명
  • 교수신문
  • 승인 2021.03.0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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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토피 지음 | 이충훈, 임금희, 강정인 옮김 | 후마니타스 | 384쪽

 

‘여권’이라는 이동 증명서, 해외여행의 ‘필수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 지구적 감염병 위기로, 거의 실종되다시피 한 해외여행. 많은 사람이 감염병 유행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하던 시절을 꿈꾼다. 2019년 기준 한국은 전 세계에서 해외여행을 여섯 번째로 많이 한 국가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에서 해외여행은 보통 사람이 꿈꾸기 힘든 ‘금지’된 것이었고, 1989년에야 전면 자유화가 되면서 여권 발급이 수월해졌다. ‘대한민국 여권’의 위상 역시 높아졌는데, 영국의 시민권·영주권 자문회사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매년 발표하는 ‘헨리 여권 지수’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여권 파워’는 일본(191개국)과 싱가포르(190개국)에 이어 독일과 함께 세계 3위이다. 한국인은 사증 없이 여권만으로도 189개 나라를 방문할 수 있다.

여권은 자유로운 이동을 보증해 주는 서류인 동시에, 국가가 바라지 않는 사람의 출입국을 통제할 수 있는 규제 수단이기도 하다. 여권을 가진 사람은 ‘국적 있는’ 사람이 되는 반면, 여권이 없는 사람은 ‘국적 없는’사람이 된다. 여행 도중 여권을 분실한 사람이 처하는 모든 난관은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여권에 대해, 여권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기념비적인 연구”

‘여권’의 이면에 숨겨진 포섭과 배제의 논리

 

『여권의 발명』은 여권과 관련된 법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의회 내 논쟁, 나아가 여권법의 시행에 따른 사회의 대응을 살피면서 ‘여권’이라는 이동 증명서 이면에 숨겨진 정치사회적 포섭과 배제의 논리를 일괄한 책이다. 저자 존 토피는 근대 국민국가 및 국가 간 국제 체계가 합법적 이동 수단을 독점해 왔고, 이 때문에 다양한 사람이 국가의 권위에 (특히, 국경을 가로지르는 이동과 관련해) 종속됐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합법적 ‘이동 수단’으로서 ‘여권’과 국가 및 국제 여권 시스템의 변천사를 상세히 다루면서, 왜 이동 수단을 통제하는 일이 근대 세계의 근간이 되는지를 역사 사회학적으로 밝힌다.

‘여권’이라는 신분 증명 문서가 수행하는 역할과 위상을 다룬 이 책의 초판(2000)은 “유럽의 여권에 대한 기념비적인 연구”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유럽 이주사, 다문화와 관련한 세미나와 수업 등에서 교재로 널리 사용됐고, 제임스 스콧 등 여러 비평에 주요하게 언급됐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2018년 개정된 제2판을 한국어로 옮긴 것으로, 저자는 이 개정판에서 학계의 비평들에 대해 논평하고, 9·11 테러 이후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여권 규제 정책에 대해 추가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권 없는’ 사람들과 ‘국가 없는’ 사람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권의 역사를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것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한 이후 국제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변화에 관해 숙고해 보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 같은 붕괴를 배경으로, 국가가 해체된 지역의 사람들 또는 전쟁과 분쟁의 결과로 떠돌아다니게 된 사람들의 ‘국적’에 관한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나타난 과정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유럽 대륙에서 제국들이 붕괴한 이후, 역사에 의해 버림받았던 사람들의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 이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국민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어떤 국가에 연고가 있었고, 그들이 국가에 빚진 것은 무엇이었으며, 국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했는가? - 본문 중에서

2015년 이후, IS와 시리아 내전 등으로 일어난 중동-유럽의 대규모 난민 이동 사태,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의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과 멕시코 국경을 따라 길게 세워진 장벽 등에서 보듯, 지금도 ‘국가 없는’ 사람들의 이동에 대한 통제와 불법 체류에 대한 대대적 단속이 계속되고 있다. ‘국적 없는’ 사람들은 다시 말해, ‘국가 없는’ 사람들, 바로 ‘여권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는 이들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그들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시작은 여권 제도의 역사와 그 포섭과 배제의 논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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