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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약속
행복의 약속
  • 교수신문
  • 승인 2021.02.1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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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아메드 지음 | 성정혜, 이경란 옮김 | 후마니타스 | 508쪽

 

 

1990년대부터 대두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는 긍정심리학계의 행복학 연구에 따르면, 긍정심리학은 부정적인 느낌에만 초점을 맞춰 왔던 심리학의 기존 경향을 “바로잡는다”며 등장했으며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칙센트미하이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행복학 연구자들이 행복의 ‘비법’을 밝혀낸다며 갖가지 설문조사와 인터뷰, 통계기법 등을 동원해 도출해 낸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행복하고 “기혼자가 미혼자보다” 행복하며, “긍정적일수록” 행복하고 “가족과 돈독”할수록 행복도가 높다. 과연 이런 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말해주는 게 있기는 한 것일까?

 

퀴어 페미니스트 철학자 사라 아메드는 이와 같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질문하며 ‘정서 이론’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행복’ 관념을 해부한다. 이에 따르면, 행복 관념은 보통 미래를 보장하는 ‘약속’의 형태를 띠며, 대개는 사회적으로 이미 좋은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재확언함으로써 그것을 추구하는 좋은 주체를 생산해 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메커니즘은 한편으로 그 대척점에 행복의 경로에서 이탈한 자들, 행복 대본을 따르지 않는 자들, 차이를 가진 자들을 위치시키고 이들을 불행의 원인으로 재현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이 책은 페미니스트, 이주자, 퀴어와 같은 불행(불운)한 주체들을 ‘행복한 가족’, ‘행복한 국가’와 같은 ‘정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정서 이방인’으로 개념화하면서 이들의 불행과 우울에 정치적 힘을 부여하는 한편, 지배적인 행복 관념이 ‘다른’ 주체로 하여금 무엇을 포기하게 하는지 보여 줌으로써 정서를 통한 권력의 작동을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 조지 엘리엇, 울스턴크래프트, 보부아르, 토니 모리슨 등의 페미니즘 정전들과 『고독의 우물』, 『루비푸르트 정글』, 『캐롤』 등과 같은 퀴어 정전들뿐만 아니라 전설의 레즈비언 드라마 「엘워드」, 「디 아워스」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들을 넘나들며 아카데믹한 철학적 논의를 거침없이 전개해 나가는 솜씨는 이 책을 “행복에 대한 필적할 수 없는 철학서”로서뿐만 아니라 퀴어 페미니즘적 문화비평의 전범으로 자리매김케 했다. 파키스탄 출신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를 둔 본인의 혼성적 배경과 동료 페미니스트들의 경험담들까지 자연스럽게 녹아든 서사에서 학문과 실천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립 연구자로 우뚝 선 저자의 현재 모습을 예견할 수도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좋은 느낌, ‘행복감’의 해부

‘미래의 약속’으로서 작동하는 행복의 메커니즘

 

‘행복’은 사회적으로 가장 자연화되어 있는 관념이자 무조건적 선으로 여겨지는 관념이다. 이는 학문적으로 반박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윤리학·철학에서 오히려 절대선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메드는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 퀴어 연구에 기반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공리주의에 이르는 기존의 행복에 대한 철학적 관점들을 폭넓게 비판하고 그 속에 숨겨진 불의를 드러낸다.

아메드에 따르면 행복은 ‘약속’의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사회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미래에 대한 약속(미래의 지연)을 통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의 약속은 우리를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어떤 대상들로 인도하고, 좋은 삶을 어떤 대상들에 가까이 가면 얻게 되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서 이론의 관점에서 아메드는 가정이나 국가를 특정 대상에 대해 동일한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유지되는 정서 공동체로 개념화하면서 이런 감정적 공간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성애적straight 주체, 착한 시민이 되는지 다양한 텍스트들을 경유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권력의 작동은 단지 ‘특정한 행복’ 추구, 이성애적 사랑과 좋은 시민을 이상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 대본에서 이탈하면 다다르게 될 상태에 대한 위협으로서 끊임없이 불행이 재생산된다. 예를 들어, 〈베컴처럼 휘어 차기〉의 이민 1세대 아버지는 인종차별의 폭력을 잊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본보기로 서사화되는 반면, 가족의 관습을 거스르고 베컴처럼 되기를 바라는 딸은 착한 영국 시민으로 비춰진다. 결국 행복 대본은 주체를 똑바르게straight, 이성애자로,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장치다.

또한 행복은 상호성의 언어로 강압을 실행하고 감추는 역할을 한다. “네가 행복하니 나도 행복해”라는 말이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지”, “네가 그러면 나도 불행해”, “네 불행이 내 행복을 위협해”, “넌 날 위해 행복해야 해”가 되는 과정에 대한 아메드의 예리한 분석은,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의 감정이 (그 타인의 생각대로) 행복해야 할 의무로 경험될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자녀의 커밍아웃을 맞닥뜨린 부모의 발화를 생각해 보자.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랄 뿐인데, 그건 너무 불행한 삶이 아니겠니”라고 하는 ‘사랑’의 표현 속에 숨겨진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불행은 과연 아이가 퀴어라서 생기는 것일까? 아메드는 불행은 정확히 이 발화의 순간부터 작동하고 발생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퀴어의 삶이 불행한 삶, 행복한 요소가 없는 삶, 남편과 자식이 없어 우울한 삶이라 간주되기 때문에 아이는 불행해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행복 발화를 이용해 퀴어를 관용하거나 승인할 때도(“그렇게 너희 둘이 행복하다면 그것도 사랑이지”) 퀴어 사랑은 그런 사랑 역시 (이성애적 사랑과 같은) 사랑이라고, 그것도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증명할 수 있을 때만 인정받는다. 아메드는 “불행하지 않음을 보여 주려면 행복해야 한다”는 그 압력이 불행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불행에 대해 (간과하지 않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서(정동)의 정치학

느낌에 귀 기울일 때 들려오는 것들

 

일반적으로 느낌이란 주체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순수하고 주관적인 무엇으로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정서 이론의 등장으로 이런 느낌(정서, 정동, 감정)이 실은 사회적 관념들로 물들어 있으며, 주체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대상들을 매개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는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무형의 분위기, 느낌 같은 것들에 응축돼 있는 ‘역사’나 지배와 억압 등을 읽어 내면서 감정을 사회를 분석하는 중요한 도구로 만든다.

예를 들어, 아메드는 이런 정서 이론에 입각해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들만 가득한 여성학회 자리에 나타났을 때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의 정체에 대해 분석한다. 사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고 그냥 나타나기만 했을 뿐인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그 흑인 여성이 유발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메드는 이런 불편한 느낌, 지배적인 행복한 분위기를 깨는 부정적 느낌의 정체 속에서 인종차별의 역사, 검은 신체에 ‘불편한 느낌’을 배치하는 권력의 작동을 발견한다. 그런 특정 신체에 ‘불편한 느낌의 원인’이라는 속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장애물로 느끼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메드는 책 전체에 걸쳐서 역사가(이 경우는 인종차별의 역사) “무형의 분위기” “걸림돌처럼 보이는 신체” “부르카나 터번 같은 대상”에 응축돼 있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자연적이라 여겨지던 느낌 속에 폭력과 권력, 억압의 원인이 어떤 식으로 은폐돼 있는지를 해부한다.

 

퀴어한 문화비평을 통한 불행한 자들의 계보 잇기

댈러웨이 부인에서 캐롤까지

 

이 책은 무엇보다 퀴어 페미니스트 문화비평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책이다. 『고독의 우물』이나 『캐롤』, 『루비프루트 정글』 같은 퀴어 정전에서부터 『댈러웨이 부인』이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같은 초기 페미니스트 비평의 대상들, 그리고 〈이 벽들이 말할 수 있다면 2〉(이하 〈더 월 2〉), 〈길 잃은 천사들〉 같은 퀴어 영화들을 넘나들며 아메드는 정서 이론가의 관점에서 기존의 공식적인 해석들을 무너뜨리거나 뛰어넘는다.

예를 들어,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에 집착하는 모습을 실망스러워했던 보부아르나, 『댈러웨이 부인』을 울프가 자신의 불행을 정치적으로 전환시키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책으로 평가한 케이트 밀레트와 달리, 아메드는 소설 속 ‘정서의 흐름’을 포착해 냄으로써 파티를 불행이 생명을 얻게 되는 사건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파티를 통해 댈러웨이 부인은 셉티머스의 자살을 “스치게” 되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아메드가 특히 주목하는 바는, 고통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낯선 자의 고통이 분위기를 방해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는 불행이란 것이 낯선 방문객처럼 도착해 익숙함을 방해하고, 익숙함 속에 있는 불편한 요소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정치적 힘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아메드는 댈러웨이 부인의 이런 인식을 “희망을 가득 채움으로써 미뤄 왔던” 슬픔을 이제는 기꺼이 경험하겠다는 공감의 제스처로 해석한다.

또한 이런 과거의 텍스트에 대한 비평을 현대적 텍스트들과 연결함으로써 시대를 잇는 불행한 자들의 계보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비평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영화 「디 아워스」의 불행한 주부 로라와 연결되고, 20세기 초 소설 『고독의 우물』의 지독히 불행한 결말은 21세기 영화 「길 잃은 천사들」의 퀴어 소녀의 불행, 그리고 「더 월 2」의 연인을 잃고도 애도하지 못하는 퀴어 연인의 비탄과 연결됨으로써 “행복한 자들의 세상”에서 “불행한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를 보여 주는 계보가 그려진다. 불행한 퀴어뿐만 아니라 인종주의 속에서 고통받는 이주자, 분위기 깨는 존재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전에 이미 문제라고 읽혀 버리는 페미니스트 등을 아우르는 그녀의 계보 그리기는 부정적 정서가 얽혀 있는 대상들, 불행한 역사로 젖어 있는 대상들을 살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몸소 보여 준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세 명의 여성들의 계란을 깨는 제스처 속에서 여자들의 역사를 따라 흘러온 ‘유산’을 발견하고, 계란을 깨뜨려 넣는 그릇이 여성에게 가하는 기다림의 압력을 읽어 내면서 집안의 행복 대상들이 어떤 여자들에게는 얼마나 위협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지는지를 포착해 낸 정서 이론가 특유의 섬세한 독해들 또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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