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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과 열기, 그리고 차가운 분노
자신감과 열기, 그리고 차가운 분노
  • 강석진 고등과학원
  • 승인 2004.07.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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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 : '제1회 여성 수학자 국제학술대회'

지난 6월 21일부터 23일까지 고등과학원 국제회의실에서 제1회 여성 수학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아니, 무슨 축구나 권투 같은 운동 경기도 아니고 수학에도 남녀 구별이 있나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바로 거기에 이런 학회가 열려야 하는 역설적 이유가 있다. 남녀 구별이 있을 이유가 없는 수학계에서 아직도 여성 수학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사라지질 않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여성 수학자들의 뜨거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주최한 한국 여성 수리과학인회(Korean Women in Mathematical Sciences)는 올해 1월 고계원 아주대 교수, 위인숙 고려대 교수, 이혜숙 이화여대 교수, 최영주 포항공대 교수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여성 수학자뿐 아니라 국내 수학자들을 대표하는 정상급 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동안 겪었던 아픔은 빼어난 역량에 비례하여 더욱 깊었던 것 같다.

최영주 교수는 이번 국제 학술대회의 의미, 더 나아가 여성 수리과학인회가 만들어져야 했던 의미를 "서로 용기를 주고, 용기를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편견과 차별 속에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없었던 여성 수학자들이 이 모임을 주된 동력으로 해 스스로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우수성을 추구함으로써 그들의 역량을 극대화하겠다는 얘기였다.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고계원 교수는 "그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혼자만의 힘으로 견디고 넘어야 했던 여성 수학자들이 이제는 서로 간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서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함께 찾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며, "특히 젊은 여성 수학자들에게 선배들의 경험을 전수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서로 자극을 느끼고 격려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학회가 시작하는 날 고등과학원 1층 국제회의실 앞 복도에 내려간 나는 회의장 복도를 가득 메운 뜨거운 열기에 당황할 지경이었다. 아니, 우리나라에 이렇게 여성 수학자들이 많이 있었나 할만큼 대성황이었다. 나는 쏟아져 나오는 여학생들을 거슬러 등교하는 사춘기 남학생이 된 심정으로 겨우겨우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 학회에서는 제인 호킨스(노스 캐롤라이나대), 린 월링(콜로라도대), 마리에 초다(오사카 교대) 등 해외 유명 수학자들과 이애자(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이윤진(스미스 칼리지), 강성하(켄터키대), 최영은(워익대), 정은옥(건국대) 같은 한국의 젊은 여성 수학자들이 초청 강연을 맡았고, 곧 이어 각 분야 별로 학술 발표가 이어졌다. 초청 강연은 물론이고 분야별 학술 발표까지 높은 수준의 학문적 완성도와 명쾌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특히 젊은 여성 수학자들의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이 내뿜는 활화산 같은 열기와 생기, 그리고 당당함과 자신감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촌티를 감출 수 없는 대한민국 남자는 나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이건 뭐 수학이면 수학, 영어면 영어,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가 있는 거야?"

이번 국제 학술대회는 학술 발표의 수준, 주제의 다양성, 그리고 참가자들의 열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었다. 대회를 주관한 여성 수리과학인회 임원들도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성공을 거둘 줄은 몰랐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과 함께 분노 또한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우수한 역량을 지닌 여성 수학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들의 분노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지난 20년 동안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 국내 명문 대학에 자리를 잡은 여성 수학자들의 숫자는 겨우 열 명을 넘지 못한다. 지방 국공립 대학과 수도권에 있는 유수 대학으로 범위를 넓혀 봐도 이러한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의 비율이 이미 (학교에 따라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50%를 훌쩍 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건 납득하기 어려운 수치다.

이렇게 답답하고 어려운 현실이지만 우리나라의 여성 수학자 그 누구도 여성이 전체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여성 수학자를 반 정도는 뽑아야 한다는 식의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건 어떤 특혜나 배려가 아니라 공정한 경쟁과 평가인 것이다. 여성 수학자들의 ‘차가운 분노’는 린 월링 교수의 농담 한 마디에 함축되어 있다.

"대수학에는 등식이 많이 나온다. 우리는 부등식이 아니라 등식을 좋아한다.(We encounter with a lot of equalities in algebra. We like equalities, not inequalities.)"

필자는 미국 예일대에서 '캐츠-무디 리 대수의 차수와 구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rystal bases for quantum affine algebras and combinatorics of Young walls' 등의 논문이 '축구공 위의 수학자'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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