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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 풍경
트렌드 :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 풍경
  • 최성일 출판평론가
  • 승인 2004.06.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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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게 견뎌낸 고전들

'고전'을 쉽게 정의하자면 '널리 오래 읽히는 책'이다. 읽히는 폭이야 최신 베스트셀러만은 못해도 읽히는 시간은 웬만한 스테디셀러 못지 않다. 그런데 꾸준히 읽히기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끊임없이 절판의 위협(?)에 시달려서다. 그런 위협을 극복하고 최근 재출간된 20세기의 저작들은 '고전적'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다. 이 책들은 첫 출간 당시에 이미 '현대의 고전'이라는 상찬을 받은 바 있다.

아쉽게도 이제 살펴볼 책들은 모두 번역서다. 그러니까 앞 단락에서 기술한, 출간과 재출간의 기준은 번역의 시점인 셈이다. 또, 재출간은 출판사가 바뀌어 책이 다시 나왔다는 뜻으로 썼다. 묵혀 있다가 같은 출판사에서 재간행된 책은 제외했다. 거듭 박음보다는 판 갈이에 주목했다는 말이다. 분야는 인문에서 문학까지 학문의 모든 분과를 아우르고 있는데 자연과학의 비중이 높다. 

바다출판사의 '21세기 뉴 클래식' 시리즈는 지난 세기의 지적 성과물을 복원하는 작업으로 새로운 세대가 20세기의 고전적 저작들과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전에 출간됐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책들을 찾아내 펴낸다"는 것이 출판사 관계자가 전하는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다. 지난 봄,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와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가 나와 '21세기 새 고전'의 주춧돌이 됐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출간이다. 1976년 삼성문화문고로 나온 '인간 등정'(삼성문화재단 刊)은 내용의 일부와 책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도판을 싣지 않은 축약본이었다. 1985년 재미 소설가 김은국의 번역으로 출간된, 텍스트를 모두 우리말로 옮기고 사진 자료들을 첨부한 '인간 등정의 발자취'(범양사출판부 刊)는 명실상부한 완역판이었다. 바다출판사 판은 김은국 번역을 바탕으로 미흡했던 점을 바로잡았다. 최신판이 이전의 책들과 또 다른 차이점 있다면, 지은이 이름 표기가 브로노프스키에서 브로노우스키로 바뀐 것. 이 책의 원서가 1973년에 나왔다는 점에서 책에 담긴 자연과학 지식이 시효가 다 된 낡은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가혹한 비판이다. 이 책은 우리말 제목대로 비단 자연과학에 국한하지 않고 인류의 지적 발달사를 두루 꿰고 있기 때문이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1995년 '정치하는 원숭이'(동풍 刊)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다. 지은이가 관찰한 침팬지 사회의 정치 역학을 통해 인간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이 책의 새 한국어판 역시 황상익 교수의 먼젓번 번역이 토대를 이룬다. 옮긴이 후기의 일절은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미국의 어느 하원의원은 의회 필독서 목록에 여러 해 동안 이 책을 올려놓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나면 펜타곤, 백악관, 의회가 예전과는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 클래식' 시리즈는 계속 나올 예정이고, 이미 두 권의 출간 일정이 잡혀 있다. 발췌본이 출간됐었다는 원제가 'Byzantium'인 존 노리츠의 '비잔틴제국 천년사'는 세 권으로 완역된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Unweaving the Rainbow'는 初譯이다.

올 초부터 나오기 시작한 도서출판 미토의 '이반 일리히 전집'은 지금까지 세 권이 나왔다. 세 권 모두 재출간이다. '학교 없는 사회'(심성보 옮김)는 1970년대와 80년대 '탈학교 논쟁'(한마당 刊), '교육사회에서의 탈출'(범조사 刊), '탈학교의 사회'(삼성문화재단 刊) 등의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됐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각기 1987년과 1990년 형성사를 통해 출간된 박홍규 교수의 번역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만큼, '학교 없는 사회'처럼 번역을 다시 하는 것이 '전집'의 이름에 값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출판사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일리히의 모든 저작을 모두 새롭게 번역하자면, 꽤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번역의 적임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데즈먼드 모리스, 칼 세이건, 제임스 러브록의 대표작들도 재출간의 '단골 손님'이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와 '인간 동물원'은 20여 년 전부터 10년 주기로 새 판을 찍었고, 최근 출간된 '피플 워칭'(까치 刊)은 '맨워칭'(까치 刊)의 개정증보판이다. 재간행을 언급한 것은 개정판에서 제목이 바뀐 사연이 재미있어서다. 원래의 제목이 남성만을 지칭한다는 오해에서 벗어나고자 그렇게 붙였다.

칼 세이건이 앤 드루안과 함께 지은 '혜성'(해냄 刊)도 1985년 같은 제목으로 범양사출판부를 통해 나왔었다. 칼 세이건의 책들은 이전에 왕왕 재출간됐다. '에덴의 용'과 '콘택트'가 그랬다. 1981년 당시 교양 과학서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코스모스'(문화서적 刊)는 이삼년 전부터 사이언스북스에서 재출간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아직 새로운 '코스모스'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갈라파고스 刊)도 같은 제목을 달고 세 번이나 나왔다. 김영사 판(김기협 옮김)은 1999년에, 범양사출판부 판은 1990년 선을 보였다. 갈라파고스와 범양사출판부의 '가이아'는 홍욱희 씨가 옮겼다.

사회과학과 문학의 현대적 고전은 상대적으로 긴 세월의 심판을 견뎌야 하는 모양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출간돼 대번에 고전적 지위를 얻은 이들 분야 책들의 재출간은 드문 형편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C.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돌베개 刊) 정도가 눈에 띈다. 1978년 홍성사에 나온 이 책은 26년만에 재출간되면서 공역자 가운데 한 명이 이해찬 국무총리 지명자(재출간 때는 의원)라는 사실이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다시 나오기 시작한 '레이먼드 카버 소설 전집'을 들 수 있다. 문학동네의 카버소설 전집은 3월 출간된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포함해 네 권으로 완간된다. 카버 전집은 1996년 도서출판 집사재를 통해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숏컷',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등의 세 권으로 나온 바 있다.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에는 더러 과거 성행한 무단복제의 관행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높은 평판을 받은 책들조차 비교적 길지 않은 세월의 무게와 심판을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말해 주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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