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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학의 인문학적 가능성과 새로운 맥락의 구성
북한학의 인문학적 가능성과 새로운 맥락의 구성
  • 교수신문
  • 승인 2021.02.0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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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주혁민은 심장이 가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다. 심장이 가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좀처럼 피로를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주혁민도 자정에 퇴근해서 새벽 3시에 출근한다. 물론 그는 소설 속의 인물이다. 심장이 가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혁민은 백보흠의 소설 『라남의 열풍』(2004)에 라남탄광기계연합사업소의 당비서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여러 허구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라남의 열풍』에는 1990년대 북한의 현실을 짐작게 해주는 묘사가 많다. 예를 들어, 당 간부를 포함해서 많은 노동자들이 밤늦게 퇴근해서 새벽에 출근한다는 묘사나 그들 중 일부가 영양실조와 과로로 죽어간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비상한 정신력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인물은 북한뿐 아니라 20세기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던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자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1936) 에도 자신을 혹사해가며 국가와 당을 위해 일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소련 건설기의 젊은 병사 파벨이 바로 그다. 파벨은 병을 얻고 장애를 얻는 와중에도 계속 전장(戰場)과 일터로 달려간다. 내용만 보면, 북한식으로 말해 ‘강철은 어떻게 마사지는가(부서지는가)?’라고 해야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작가인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죽도록’ 일하고 싸우다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주혁민과 파벨은 새로운 인간형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정신력이 놀랍도록 강하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진정 새로운 인간이었을까? 

북한에서는 문학을 인간학으로 규정한다. 김정일이 『영화예술론』(1973)에서 내린 문학의 정의이다. 이런 생각은 러시아의 막심 고리키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의 일본어 번역어 닌겐가쿠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평양 외국문출판사에서 나온 『영화예술론』의 영역본(1989)은 인간학을 휴머닉스(humanics)라는 아주 생경한 어휘로 번역한다. 북한의 영역서는 이런 경우가 많다. 번역을 희한하게 해서 해당 개념의 계보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인간학을 휴머닉스라고 번역하면, 이것은 마치 새로운 인간형을 만드는 신비한 ‘레시피’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인간학은 소련 초기부터 사회주의 문학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며, 역사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된 기획이기도 하다. 

문학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북한의 인간이 서구 세계의 인간과 완전히 같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애초에 서구 르네상스의 산물인 표준적인 인간(혹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신화에 불과하다. 인간은 제각각 인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사조들은 이러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다 다르다. 

그래서 북한을 연구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허구와 실재의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으면서도 또한 우리와는 다른 인간들이다. 우리처럼 과로하면 죽고, 우리와 달리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간다. 하긴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마저 성별, 계급 등으로 다 나뉠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라는 연구대상은 늘 인문학적 성찰이나 방법론을 요구한다. 저들은 어떤 인간인가? 또한 저들을 공부하는 나는 어떤 인간인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현재 나의 자리는 북한대학원대학교 남북한마음통합연구단에 있다. 마음이란 애초에 인간의 특질일 수 있기에 인문학 전공자로서 남북한마음통합연구단이라는 사회과학연구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많은 학문적 동지를 얻었다. 안보 이슈가 압도하는 북한학이라는 지역학의 특성상, 인간이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맥락에서 벗어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인문학 전공자로서, 그리고 사회과학전공자로서 북한 연구의 새로운 ‘맥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성희

북한대학원대학교 남북한마음통합연구센터 연구교수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에서 「권위와 감정: 북한문학의 종교적 상상력」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북한대학원대학교 남북한마음통합연구센터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학이론, 북한문학, 동아시아 냉전 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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