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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이야기
화교 이야기
  • 교수신문
  • 승인 2021.02.0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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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지음 | 너머북스 | 360쪽

 

남중국해의 화교 네트워크

중국과 동남아를 연결한 초국적 세계

 

‘바다야말로 민(?) 지역 사람들의 밭이다.’라는 말만큼 푸젠과 광둥 사람들의 정체성을 잘 표현해 주는 문장은 없다. 남중국해를 건너 동남아시아로 향한 푸젠과 광둥 출신의 상인, 노동자, 기술자 들은, 근대 이전에는 해상 실크로드에서 아랍 상인들과 다투었고, 아시아 근대의 아수라장에서 네덜란드, 영국, 일본 제국의 파트너이자 경쟁자로 살아남아 결국 승리했다. 그 비결은 보이지 않는 영토, 화교 네트워크의 형성에 있었다. 『화교 이야기』는 ‘이민·교역·송금’ 네트워크에서 끄리스땅, 페라나칸 등 혼혈 문화와 알라신을 믿는 중국인, 하이난 퀴진, 베란다 건축, 푸젠의 발리촌 등 인종, 상업, 음식, 종교, 싱가포르의 탄생 등에 이르기까지 총천연색의 드라마를 펼친다. 싱가포르 최초의 한국인 이주자와 도남학교 이야기도 부록에 붙였다.

 

싱가포르국립대에서 화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종호 교수(서강대 동아연구소)는 중국인의 동남아로의 대량 이민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문명사적 현상으로, 한마디로 말해 동화와 융합, 혼종의 역사라 역설한다. 저자는 국적과 인종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중국계 싱가포리안’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한국 사회 안의 이주민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국민국가에 기반하여 인식적 경계를 설정하는 우리의 배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화교 이야기』는 21세기의 화두,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너머북스의 특별기획으로, 중국의 가장자리에서 중국과 세계를 다시 새롭게 보자는 취지의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시리즈의 『만주족 이야기』(2018, 이훈)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화교의 기원, 푸젠의 민난인은 어떻게 화교가 되었나?

 

바다로부터 시작된 민난 지역의 정체성은 이슬람 중심의 해상 실크로드에서는 취안저우라는 국제무역항을 통해, 근대에 들어서는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으로 개항한 샤먼을 중심으로 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무역을 통해 외부와의 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초국적, 초지역적으로 형성되었다. 명 · 청 대 민난 지역의 가장 유명한 수출품은 차(茶)였다. ‘티’의 어원이 민난의 방언인 ‘떼’에서 기원했을 만큼 푸젠은 차의 주산지로 안시의 철관음, 우이산의 대홍포 등의 차는 유럽 귀족의 기호식품이 되었다.

 

그러나 『화교 이야기』에서 김종호 교수는 민난 지역의 진정한 ‘히트상품’은 바로 사람이라 썼다. 남중국해를 오간 화상의 활동은 취안저우가 대항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당대부터 송 · 원 대를 거쳐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지만, 근대 시기 민난인의 해외 활동은 주로 동남아시아로의 ‘노동이민’이 그 핵심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가 동남아의 대부분을 식민화하고, 자원 착취라는 목표를 위해 건설한 아편, 설탕, 커피, 팜오일, 고무 농장 및 주석, 금은 광산에 필요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상당 부분 중국으로부터 충당했다. 이른바 계약화공, 릭쇼 쿨리(인력거꾼) 등 대량 이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화교(華僑)’라는 용어는 언제 생겼을까? 동남아시아에 이주해온 중국인들은 출신지에 따라 민난인, 광둥인, 차오저우인, 하이난인, 커지아인으로 각기 불리거나, 혹은 화상, 화공, 쿨리 등으로 그 직업에 따라 불려왔다. 이들을 모두 화교라는 용어로 공식화한 것은 1909년 청 제국이 선포한 국적법에 바로 ‘화교’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화교들의 송금이 청 제국 경제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자 종래 해적시 하는 태도를 바꾸어 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는 중화를 의미하고, ‘교’는 위진남북조부터 쓰인 용어로서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해외 동포를 ‘교민’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나왔다.

 

보이지 않는 영토, 화교 네트워크

 

『화교 이야기』는 19세기 이후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의 동남부 지역과 동남아 사이에 수백만 명에 달하는 대량 이민이 왜, 어떻게 생겼는지, 그들이 번 돈을 중국의 가족들에게 어떻게 송금했는지, 아수라장 같은 아시아의 근대를 어떻게 살아남아 동남아시아의 주류가 되었는지를 살피는데 화교의 중요한 동력이자 생존의 비결은 다름 아닌 ‘네트워크’였다. 혈연 및 지연에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화교공동체는 이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였고, 본국인 중국이 서구 세력에 의해 침몰해 가는 시대에는 홀로서기를 위한 생존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민 · 무역 · 송금’ 3가지 축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크워크에서 저자는 특히 ‘송금’에 주목하여 네트워크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대목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로 퍼져 노동력의 대가로 돈을 벌게 된 화교는 대부분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성인 남성이기에, 번 돈 대부분을 교향(화교의 고향을 이르는 말)의 가족에게 송금했다. 이주의 증가는 곧 송금의 증가였다. 수백만의 화교가 보내는 송금은 가정 경제와 교향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중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했다. 화교의 송금은 이러한 경제적 효과와 더불어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화교공동체와 교향을 연결하는 물질적 기반이었다.

 

민난 지역의 방언으로 ‘교비’(교는 해외 거주민, 비(批)는 돈과 편지가 결합된 형태의 송금 방식)라고 불리는 화교 송금을 담당한 이들이 ‘수객’이었다. 이들은 해외 중국인 커뮤니티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남중국해를 무대로 한 소(小)무역상으로 동남아에서 구입한 진귀한 물품을 샤먼이나 샨터우로 건너가 판 뒤, 고향 마을을 돌면서 교비를 전달하고 신객을 모집하여 다시 동남아로 건너가는 식이었다. 우정 시스템, 은행, 전신 등이 없었던 19세기 초중반까지 수객을 통한 송금 전달 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책에는 풍랑으로 목숨과 함께 교비마저 잃어버린 사연이나 비열한 수객이 교비를 가로챈 사연 등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화교의 폭발적인 증가에 따른 송금 의뢰 수집과 발송 능력의 한계는 교비국으로 대표되는 전문적인 송금 처리 기구를 낳았다. 교비국은 이내 20세기 초반 근대 금융 네트워크로 확장되는데 이른바 ‘화교은행(OCBC Bank)’은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동남아와 중국 푸젠, 광둥 지역에 걸친 초국적 금융 송금 네트워크의 산물이었다.

 

동남아 화상이 근대를 살아가는 법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 네덜란드 등 서구 제국의 식민지배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시아의 상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했다. 전통적인 남중국해의 해상 실크로드에 서구가 이식한 자본주의 상업제도와 교통, 통신의 인프라로 인해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초국적 시장이 열렸던 것이다. 이때 제국의 상인들인 인도 상인과 일본 상인들이 밀려들었다. 인도 상인은 ‘대영제국’의 제국민이라는 지위를 상업 영역에 이용하였는데, 영국령 말라야의 경우 1844년에서 1931년 사이에만 30만 명의 인도 상인이 진출했다고 한다. 후발 주자인 일본 상인의 진출은 청일전쟁 이후 타이완을 할양받으면서 본격화했는데 국가가 관리한 일본 상인은 제국 진출의 첨병이었다. 화상들은 두 상인 집단과 협력과 경쟁을 했다. 그런데 21세기 현재까지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깊게 뿌리내려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리며 초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한 이들은 화상이 유일하다. 저명한 학자 왕궁우가 ‘제국 없는 상인’이라 명명했던 화상들은 본국의 지원 없이 어떻게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무국적과 다국적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화상의 생존법을 구체적으로 풀어낸다.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낯선 타국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였을까? 화교들은 상업적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현지 여성과 결혼을 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는 등 자신들의 종교, 소속감, 문화, 심지어 인종까지도 바꾸는 교류와 적응이 화상이 생존한 비결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과 일본 점령을 맞은 화교 기업가들의 친일행각, 그리고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소개하는 한편, 동남아의 저명한 화교 기업가인 탄카키(Tan Kah Kee)를 사례로 전후 냉전 시대 푸젠이라는 지역을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고 서구 제국의 질서 하에서 활동을 벌이던 화교들이 동남아 국가들의 독립 이후 국민국가 시대를 맞아, ‘제국민’과 ‘국민’ 사이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강요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혼혈의 탄생과 까삐딴 시스템

 

동남아시아의 근대는 서구 제국-화교-동남아 현지사회의 삼각 구도로 작동했다. 말할 것 없이 화교집단이 서구제국과 동남아 세계를 링크하는 역할을 했다는 뜻인데,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끄리스땅, 페라나칸 등의 ‘혼혈’과 서구의 식민지배 방식인 ‘까삐딴’ 시스템을 만나게 된다. 유럽 국가의 동남아 진출로 인해 발생한 다양한 혼혈 그룹은 크게 포르투갈과 동남아인 사이의 혼혈, 중국인과 동남아인 사이의 혼혈로 나눌 수 있는데 앞의 후예들이 끄리스땅이고 뒤의 후예들이 페라나칸(말레이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이’)이다. 저자는 혼혈 집단이 화교의 존재 양태에 끼친 영향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간단히 언급하면 서구 제국들은 장거리 식민지배의 공백을 혼혈 그룹을 통해 메웠는데 점차 중국인 혼혈 후예들이 이어받았던 것이다. 서구 제국들이 이를 공식화하여 마치 제국의 식민지 공무원처럼 활용하였으니 바로 까삐딴 시스템이다. 20세기 중반 동남아 국가들이 독립, 건국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반(反)화교 정서의 근간에는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했던 이들 중국계 혼혈의 활동이 자리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동화와 융합, 혼종의 역사

 

수 세기에 걸친 중국인의 동남아 이민은 동화와 융합, 혼종의 역사다.『화교 이야기』는 중국인들의 대량 이주가 발현시킨 다양한 현상들을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기술한다. 전술한 것처럼 중국인들이 현지의 커뮤니티에 스며들어 발생한 혼혈 그룹과 함께 이슬람화한 화교에서 심지어 힌두교를 믿는 중국인들을 소개하는데 푸젠의 발리마을과 발리의 화교공동체가 그것이다. 발리에서 푸젠으로 건너간 귀환 화교의 발리 문화적 요소와 발리에 남아 있는 중국계가 발리의 힌두문화에 적응한 양상은 동남아시아의 인도화, 이슬람화, 제국주의적 팽창, 전쟁과 냉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된 남중국해를 무대로 한 화교공동체 형성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일례이다.

 

특히 동남아시아 하이브리드 건축 양식인 숍하우스 ‘베란다’ 건축 양식에 관한 이 책의 서술은 자못 흥미롭다. 동남아의 ‘베란다’는 우리가 흔히 아파트에서 보는 베란다와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각 건물 일층 점포 앞에 형성된 외부 복도를 말한다. 숍하우스 베란다 공간은 중국 동남부 연해 지역의 ‘점옥’, 벵갈 지역의 ‘벙갈로우’, 그리고 열대지방 특유의 현지 문화 결합된 그야말로 ‘코스모폴리탄한’ 동남아 문화를 보여준다. 관심을 끄는 것은 동남아에서 형성된 이 혼종적 건축문화가 다시 남중국해를 건너 중국 대륙의 교향 도시로 역수출되어 도시 개발과 도심지 형성의 주요 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인종, 다문화 싱가포르

 

『화교 이야기』는 대영제국의 식민도시 싱가포르가 일본제국의 쇼난토를 거쳐, 어떻게 다인종, 다문화 국가 ‘싱가포르 공화국’을 세우게 되었는지 그 여정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싱가포르는 이주민으로서 제국의 신민으로 삶을 영위하던 화교들이 공산화한 중국 대륙도 아니고 국민당이 점령한 타이완도 아닌, 그들만의 국가 공동체를 형성한 케이스이다. 그것도 중국계만의 국가가 아니라 다인종 ·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한 ‘싱가포르 공화국’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싱가포리안’을 탄생시킨 것으로, 세계 이민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로 꼽힌다. 싱가포리안은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인식하도록 교육받은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들지만 우리 안의 폐쇄성을 깨뜨릴 수 있게 하는 타자의 역사적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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