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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적상산사고의 운영과 봉안자료 연구』 발간
한국학중앙연구원 『적상산사고의 운영과 봉안자료 연구』 발간
  • 김재호
  • 승인 2021.02.0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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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자료 보존을 위해 지방에 별도 사고를 운영한 아시아 유일의 국가!
고려시대에 해인사에서 시작된 국가 중요자료 복사본 보관!
산 넘고 바다 건넌 왕조실록 피난 여정의  고찰!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우)은 조선이 중요자료 보호를 위해 전라도 산중에 조성한 적상산 사고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연구한 『적상산사고의 운영과 봉안자료 연구』(임선빈 외 지음, 16,000원)를 발간했다.

조선은 국가의 중요 서적들을 보관하기 위해 궁궐 안에는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사고를, 지방에는 외사고(外史庫)를 설치했다. 실록을 편찬·보관했던 중국, 베트남 등의 나라 가운데 외사고를 설치하고 운영했던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외사고는 고려 고종 때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역대 실록의 부본(副本)을 해인사에 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북방으로부터의 병화(兵禍)를 우려하여 남쪽의 읍치에 설치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이 모두 소실된 후, 조선 후기부터는 깊은 산중이나 섬에 설치했고, 실록을 보관하는 건물인 사각(史閣)과 왕실 보첩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을 함께 갖추어 운영했다.

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조선 조정과 백성들의 노력은 재난 극복의 드라마와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료가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왕조실록을 전라도 유생 손흥록이 사재를 털어 내장산으로 옮겼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손흥록은 조정과 협력하여 정읍으로 옮겼고,  다시 태인, 익산, 임천, 부여 등을 거쳐 아산에 도착하였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여서 실록을 해주로 옮겼다가 다시 배에 실어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겼다. 이 묘향산에 보관된 자료가 다시 전라도 적상산 사고에 봉안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자랑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조실록이 보존된 것이다.

이 책의 주제인 적상산사고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외사고 중 한 곳으로, 1614년(광해군 6) 전라도 무주의 험준한 적상산성 안에 건립했다. 1616년에 『선조실록』을 봉안했으며, 1634년(인조 12) 묘향산사고의 자료를 이안(移安)하면서부터 외사고로서 본격적으로 기능했다. 적상산사고의 자료는 조선 후기의 수정실록 편찬, 역사적 전례의 인용과 내용 요약 등에 널리 활용되었다. 그 이유는 춘추관사고가 이괄의 난으로 조선 전기 실록이 소실되고, 강화의 정족산사고본 자료가 병자호란으로 결본이 많은 데 비해서 결본 없이 완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사고로서 조선 후기의 수정실록 편찬

적상산사고는 300여 년간 유지되었고, 1981년에는 이곳의 자료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그리하여 적상산사고 장서의 역사는 400여 년간 진행 중이다. 오랜 기간 굴곡의 역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사고의 장서가 완벽히 보존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적상산사고의 장서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은 기록문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적상산사고의 연혁을 밝히고, 사각과 선원각의 운영과 소장 자료의 성격을 살피고 있다.

먼저 임선빈의 「외사고 운영과 적상산사고의 위상」은 고려·조선시대 외사고 운영의 역사적 배경과 성격을 분석하고, 조선 후기 적상산사고의 위상을 밝히고 있다. 이 글에 의하면, 실록을 편찬하던 동양 삼국 가운데 한국만 유일하게 외사고를 운영했다. 고려시대 외사고는 사찰에 설치한 사찰사고의 성격을 띠었고, 조선 전기 외사고는 읍치사고로 삼남의 큰 고을에 실록각만 설치한 반면, 임진왜란 이후 외사고는 실록각 외에도 선원보첩을 봉안한 선원각을 함께 설치 운영했는데, 전란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와 묘향산(후에는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 등의 깊은 산중에 설치한 산중 사고였다. 그중 결본 없이 완비되어 있던 적상산사고의 자료는 조선 후기에 수정실록의 편찬이나 역사적 전례 고출에 널리 활용되었음을 밝혔다.

김정미의 「적상산사고 사각형지안을 통해 본 봉안 자료의 관리와 운용」은 적상산사고 사각의 봉안 자료의 관리 및 운용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장서각에 소장된 1606년부터 1910년에 걸친 묘향산사고와 적상산사고의 사각형지안 110여 종을 연구 대상으로 했다. 적상산사고의 사각형지안은 사각에 봉안된 실록 등의 목록을 비롯하여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시행한 포쇄와 사각의 수리, 자료 고출 등의 현황을 기록한 자료이다. 이 글에서는 장서각 소장 사각형지안을 분석함으로써 사각에 봉안된 자료의 포쇄를 비롯한 관리, 자료의 입고 경로를 파악했고, 건물 수개 등과 관련한 규정, 절차, 소용 물품 등을 분석하여 사각의 운용 실태를 체계적으로 규명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강문식의 「적상산사고 사각 소장 자료의 구성과 특성」은 1910년 마지막으로 작성된 적상산성 사각 조사 형지안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했다. 이 글에서는 적상산사고의 사각에 소장되었던 서적의 전반적 현황을 형지안의 기록을 근거로 실록, 상고(上庫)와 하고(下庫)의 일반도서로 구분하여 그 도서 구성의 주요 특징을 파악했다. 이를 통해 적상산사고 사각 자료에는 실록 외에도 조선 후기 영조·정조 대에 편찬된 사료가 다수 포함되었음을 밝혔다. 그중 상고에는 어제 어필류, 『열성어제』, 왕실 보첩, 전기, 역사 관련 자료, 어정 명찬서 등이 포함되었고, 하고에는 의궤류와 형지안 외에도 사가 문집류, 족보, 유학서적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왕실 사료 외에 다수의 서적이 사각에 보관된 배경을 영조·정조 대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하여 분석한 점이 주목된다.

조계영의 「적상산사고 선원각의 봉안과 관리 체계」는 적상산사고 선원각에 선원보첩을 봉안한 후 포쇄하고 선원각을 수리하는 사안이 순환되는 관리체계를 고찰했다. 이와 같은 관리체계는 외사고가 동일하지만 사고가 세워진 지역의 여건과 건립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지닌다. 적상산사고 선원각은 여타의 외사고와는 달리 최초의 형지안이 현전하지 않아 선원각의 초기 양상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종부시등록』과 『식년선원록등록』을 주목해 선원각의 건립과 봉안 행차를 준비하는 종부시의 문서 행정을 조명했다. 1648년에 발생한 적상산사고 선원각의 변고는 형지안을 통해 변고의 배경과 종부시의 대처를 규명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종부시는 선원보첩을 편찬하고 기록하는 업무 못지않게 외사고에 선원보첩을 봉안하고 관리하는 비중이 컸음을 보여준다.

원창애의 「적상산사고 선원각 소장 자료의 특성」은 적상산사고 선원각 관련 형지안 65종을 바탕으로, 선원각 소장 자료의 특성을 분석하고 선원보첩의 봉안 현황을 파악했다. 선원보첩은 왕실 친족 구성과 왕실 족보 체제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사료이다. 이 연구에 의하면, 선원보첩은 적상산사고 선원각에 1641년부터 봉안되었고, 1783년까지 식년마다 봉안되었다. 그러나 1679년 간행된 『선원계보기략』, 1681년 편찬된 『국조어첩』, 영조 때부터 봉안된 『열성팔고조도』 등 새로운 왕실 보첩의 등장은 선원보첩 작성과 봉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690년부터 1776년까지 종부시 제조를 봉안사로 삼아 도성에서 외사고에 선원보첩을 봉안했고, 그 봉안 의례는 실록과 달리 새로운 선원보첩을 봉안한 후 그곳에서 수정이 진행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1681년 간행된 『선원록』부터는 수정 부분을 미리 필사하여 개장(改裝)했고, 1724년부터는 개장 후 이전의 선원보첩은 세초하는 것을 정식화했음을 파악했다.

이재준의 「장서각 소장 적상산사고본 연구」는 장서각에 현존하는 적상산사고본의 현황을 통계를 기반으로 적상산사고본의 성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찰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장서의 근원은 1634년 묘향산사고의 장서가 적상산사고로 이안되면서 비롯되었다. 특히 장서각 소장본 가운데 장서인 ‘무주적상산사고소장조선총독부기증본(茂朱赤裳山史庫所藏朝鮮總督府寄贈本)’이 압인된 문헌은 683종 2,681점으로, 북한으로 반출된 실록800여 점과 형지안에 보이는 선원각의 장서 1,402점을 포함하면 적상산사고의 장서 규모는 5,000여 점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했다. 적상산사고의 장서는 의궤, 형지안, 문집 등으로 대별되며 의궤는 180종, 형지안은 사각형지안 109종과 선원각 형지안 62종 등 총 171종, 문집 132종, 기타 문헌 200종으로 분석되었다.

이 책은 장서각 소장 적상산사고 자료 연구의 첫 출발점으로 적상산사고의 역사적 연혁을 밝히고, 사각과 선원각의 운영과 소장 자료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살펴본 점에서 의의가 있다. 비록 적상산사고의 실록 대부분은 북한으로 반출되었지만, 사각에 소장되었던 일반 자료를 비롯하여 선원각의 왕실 보첩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학계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지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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