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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전복시킬 말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폭력을 전복시킬 말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 강민규
  • 승인 2021.01.29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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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책들_『시작의 앎 : 프란츠 파농의 임상』 | 도미야마 이치로 지음 | 심정명 옮김 | 문학과지성사 | 303쪽

일상에 스며든 압도적 폭력
방어태세를 통한 반전의 가능성
다초점의 능동적 미래 구성

이 책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일본 사회에 편재(遍在)하는 폭력을 주시해온 도미야마 이치로의 최근 저작이다. 사료들을 방대하고 촘촘한 사유로 엮어 해석하는 것이 그의 특징인데, 그 해석의 산물은 다시 독자의 세계에 다채롭게 접속되곤 했다. 예컨대 전시에만 한정되지 않는 오키나와의 계엄 상황이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참조되는 식으로 말이다.

이번 책은 마치 저자가 그런 독자의 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책을 읽어내는 듯하다. 책들에서 일관된 생각의 흐름 하나를 뽑아 정련하고 자신의 일상 세계를 그에 덧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흐름을 추려 보면 이렇다. “전장에서의 폭력은 실은 일상의 실천과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전장의 기억』) “그 폭력 위에 우리는 수동적으로 놓여 있지만, 그곳에서 저항의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폭력의 예감』) “이는 특히 새로운 가능성에 관한 말들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유착의 사상』) 사실 그간 저자의 책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낯익은 메시지이겠지만 그것이 선명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를 향해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 미덕이다.

논의의 주요 개념은 ‘신문(訊問)공간’과 ‘방어태세’이다. 신문공간이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는(문답무용)” 압도적인 수동성이 만연한 상황을 뜻한다. “어, 검둥이다”라는 명명만으로 한 인격체가 착색・고정되는 상황, ‘15엔 50전’의 발음에 생사가 결정되는 상황(간토 대지진), 오키나와어로 말하기만 해도 간첩이 되는 상황(오키나와 전투)이 그 예다. 

해명 요청이나 항변이 ‘말’로 인정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문답무용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이는 결코 특수하고 제한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때의 폭력은 그 존재만으로도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감각을 낳으며 무력감을 확산시키고, 따라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미 폭력의 기저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기지 섬이 된 오키나와에서 계엄 상태의 질서가 실은 평시의 일상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앎이란 실천 속의 자기 이해

그러나 이 상황이 항구적이지는 않다. 폭력을 감지하고 미리 ‘방어태세’를 취한다면 다른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 방어태세란 그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상황을 앞질러 구성해가는 능동적인 전개’의 시발점인 것이다. 전작에도 나온 이 용어에는 풍부한 예증이 따라붙는다. 폭력의 상처를 자기 몸에 떠맡으며 상황을 바꿀 ‘말’을 재개하고자 한 파농(1925~1961), 토지 강제 수용에 반발하며 아직 확실치 않은 타개의 움직임을 애써 모색한 산즈리카 투쟁의 겁쟁이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신문공간에서 어떻게든 ‘말’을 확보하고자 했다. 즉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말을 한 것이 되게 할까’를 고민한 것이다. 어떤 저항 운동이 발생하면 흔히 조직화된 저항 담론이 시선을 끌지만, 저자는 이처럼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반전시키는 최초 국면에 주목했다. 그 국면에 다양한 초점의 말들이 모여들면서 반전의 장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제목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시작’이란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할 말을 확보한다는 뜻이고, ‘앎’은 그 실천의 한가운데서 세계와 자신을 이해해나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앎은 사태를 대상화하는 인식이나 해설과는 다르다. 스스로 임상을 통해 기존 말의 질서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파농이 줄곧 거론된 것도 그런 앎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논의에 우리의 현재가 그대로 연계된다는 점이다. 인종주의, 식민주의만이 아니라 소통 창구가 막힌 학교나 직장, 수량화된 동질의 “좋아요!”가 집적되는 가상공간도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대학이 경영 논리로 서열화되고 그 구성원들까지 파편화된 상황이 보론으로 실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확실히 이런 현실에서 저자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주변의 폭력을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수동성을 반전시킬 말을 어떻게든 모색하며, 그럼으로써 다초점의 반전 거점을 만든다는 처방은 매력적이다. 

폭력 상황의 인지부터가 과제

하지만 여러 상황들이 신문공간으로 통칭될 때 그것들의 개별성이나 역사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특히 진행 중인 현재에 대해서는 그 사회적 조건이 정치하게 논의되지 않았거니와, 부제로 삼은 파농의 상황도 다른 신문공간들과 차이가 있다. 파농은 타인이 그에 대해 가진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의 ‘외관’에 의해서 차별받은 경우로, 신문공간이 결정되는 심급이라든가 피억압자의 분열적・양가적 심리는 사실 그와 비근한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 5장 참조). 

그런데 이 점은 결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의 과제로 읽혀야 할 것 같다. 신문공간의 경계나 규정이 역사 속에서 모호함을 띠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테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이 얼마나 ‘신문공간적’인가이다. 예의 개별성과 역사성 때문에 그 판단이 분분하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초점의 말들이 풍성하게 모이게 되는 셈이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말들의 다양성이 이처럼 신문공간을 파악하는 장면에서부터 확보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그 파악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 혹은 역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말들이 어디론가 모여들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중대한 폭력의 존재를 알리는 징후일 것이다.

 

강민규
강원대 교수·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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