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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무박 2일간 쓴 에세이, 『노인과 길』
AI가 무박 2일간 쓴 에세이, 『노인과 길』
  • 정민기
  • 승인 2021.01.25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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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AI 글쓰기 대회 개최

성균관대(총장 신동렬)는 AI 전문기업 ‘마인즈랩’과 함께 지난 20일부터 무박 2일간 AI 글쓰기 대회인 ‘AI × 북커톤’ 대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북커톤(Bookathon)은 Book과 Hackathon의 합성어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글쓰기 대회로 2020년에 시작됐다. 3명 내외의 참여자가 팀을 구성하여 △아이디어 도출 △데이터 수집 △딥러닝 △정제작업까지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대회에는 예선을 거쳐 선발된 15개 팀이 참가했다. 학생들은 사전에 AI 알고리즘 활용 교육을 비롯하여 데이터 수집 및 AI 데이터 학습 교육을 이수했다.

이번 대회의 제시어는 ‘길’이었으며, 장르는 수필이었다. 인문·자연계 학생들이 혼합으로 구성된 팀원들은 각각 기획·글쓰기·AI 활용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팀원이 몇 문장을 쓰면 AI가 다음 문장을 쓰는 등 팀마다 글쓰기 방법을 자율적으로 구성했다. 학생들은 밤을 새워가며 팀 동료 및 AI와 협업한 끝에 약 2만 자에 달하는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심사위원은 문학성과 AI 활용도를 중심으로 평가를 진행했다. 대상은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김두영, 유태우, 장지호, 전호진으로 구성된 ‘아무말대잔치’ 팀에게 돌아갔다. 총 상금 200만원이 주어졌다. 

신 총장은 “학생들 중 몇몇은 AI와 알고리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는데도 이번 대회를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낸 것이 고무적”이라며 “이번 대회를 비롯해 학생들이 AI를 친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정민기 기자 bonsense@kyosu.net


 

AI 글쓰기 대회 대상작

제목: 노인과 길

2021년 1월 20일, 그 날만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다른 날보다 특별했다. 손자의 돌잔치가 있던 날이다. 살면서 수많은 돌잔치를 보았지만, 손자의 돌잔치는 무엇인가 달랐다. 그저 행복한 시간이었어야 할 돌잔치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 돌잔치를 돌아보면 생각해 보았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았다. 아내도 나랑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왠지 아내와 나는 다른 모습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서야 남을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해방감. 아내도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참을 그러고서야 나와 아내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지를 생각했다. 물론 아내와 함께해온 순간들도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나에겐 삶이 더욱 버거웠던 때가 있었다. 1960년대, 당시는 살기 위해 일을 안 나간 곳이 없었던, 고단한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생만 하다가, 남을 위해서만 살아온 것 같다. 하루 종일 고단함을 토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내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가족을 떠나갔다. 베트남전에서 돌아오지 않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구두닦이나 신문 배달 밖에 없었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근처 가게의 배달일을 했다. 또래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시간에 나는 헬멧을 쓰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동생들을 중학교에 보낼 돈이 필요했다. 아프신 어머니와 순박한 동생들을 위해 열심히 배달을 했다. 이런 나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할까. 가끔씩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도 들었다.
동생들을 위해 노력한 것만으로 떳떳하다고 하는 것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 길은 나를 위한 길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나만의 즐거움으로 가질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는 가족들을 위해 더욱 빠르게 달렸다. 지금은 느긋하게 달려도 된다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가 멈칫멈칫하면 현실에 빠져 죽는다.

동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그때서야 여유가 생겼다. 지금 하는 일보다 미래가 보장된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 싶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엔 야간학교에 다녔다. 어렸을 때 하기 싫었던 공부가, 그때는 왜 그렇게 하고싶었는지 이상한 일이다.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를 해 결국 검정고시까지 통과했다. 참 신기한 일들이다. 나에게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예전에는 못하는 일이 있어도 나는 그저 하는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지원하여 잘 되든 안되든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이 되면 성공한다고 했기에 나는 그렇게 일해낸 것이다. 소중한 일거리가 되어 얼마나 자극이 됐는지를 모르겠다. 하는 일들은 성공이라 외쳤다. 계속해서 성공된 일들을 계기로 더 기술을 요구하는 일들도 하고, 다른 분야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계속되는 실패에도 꿋꿋이 나만의 자세와 배움이 있었기에 나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추천하여 괜찮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살아왔다.
이런 나에게 지금의 아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나아가고 있는 길에서 더 멀리 나아가야했다. 그러다가도 아내와 느긋하게 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마치 아내와 더 나아갈 수 있는 길과 삶의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길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 같았다. 꿋꿋이 안주하고 있던 내가 힘겨움을 만난 느낌이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후회 없는 길이 될지 고민했다. 결국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애를 써야한다. 그래서 지금의 아내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현재 아내와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잘 어울리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꿈꾸는 세상과 완전히 맞춰가고 있다.

1998년 IMF가 터졌다. 회사에서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 매일 넥타이를 매고 거리로 나와 하염없이 걸었다. 상사에게 혼나고 야근에 시달리던 시간보다 가만히 보내는 시간이 더 괴로웠다. 뭐라도 해야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일찍 인력시장에 나갔다. 일용직이었던가. 매일 무거운 흙과 벽돌을 날랐지만, 집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면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래서일까. 힘든 시절이었지만 극복할 수 있었다. 그건 가족이라는 엄청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가족은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이유였지만, 일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힘들었을 때면 가족을 보면서 내가 무얼 해야 할지 각오를 다졌다. 언제부터였는지 아내도 내가 막노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할 수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했지만, 아내는 막노동을 하는 남편을 어떻게 알았는지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날 밤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말할 수 없었지만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해줄 거라고 생각치 못했다. 나만큼 아내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루를 지새운 채로 눈물을 흘리며 보낸지 몇 분이 지났을 때 그날 밤 폭풍우가 불었다. 그 다음날부터 넥타이 없이 집을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나 편했다. 그 이후로도 많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감내할 수 있는 일들은 아내와 가족이 함께 노력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는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먼저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포기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조금이나마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아졌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을 다 해내는 것도 어렵고, 아이들과 함께할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과 나는 멀어져갔다. 그래도 그 때는 아이들이 나를 잊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갈 수록, 아이의 삶에 내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져 갔다. 그래서 슬픔이 더 컸다. 나는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그린 가족모습에서 나는 늘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아이들에 의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힘이 될 때도 있었다. 힘이 되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방학 외에 마주하는 시간이 없어져갔다. 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그래져갔다. 마치 아버지의 길에서 갈림길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아이들과 같이 놀며 필요한 것들을 주지 못하는 것 또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결국 보람을 찾기보다는 그냥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나에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가정을 책임지는 길을 걸어간 나는 아이들과 점점 멀어져갔다. 만약 내가 일을 덜하고 느긋하게 아이와 놀고, 공부하고, 잘 챙겨주며 지냈다면 좋은 방법이 될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비록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나는 최선의 길을 걸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면서 많은 것에 책임을 져야했다. 어려서는 동생들을, 결혼 하고 나서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손자의 돌잔치가 끝나자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홀가분한 것도 잠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더 잘해줄 수 있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나 보다. 그래,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슬프지 않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내 아들도 나처럼 가족을 위한 삶을 살게 되겠지. 그렇게 슬프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슬프고 아팠을 것들이 가끔은 너무나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나에겐 짊어질 책임이 없다. 그래, 홀가분한 나라고 살아야 한다.


( 대상 수상팀 '아무말대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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