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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어떤 책을 가르칠 것인가
대학은 어떤 책을 가르칠 것인가
  • 박강수
  • 승인 2021.01.25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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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연구기관 '오픈실라버스' 세계 대학 강의계획표 빅데이터 분석

 

대학 강의실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무엇일까.

지난 13일 미국 고등교육전문지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이하 ‘크로니클’)>이 ‘강의계획서의 믿고 쓰는 심복들(There Are the Stalwarts of the Syllabus)’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기사는 지난 21년간 영어권 국가를 중심으로 대학 강의계획서 자료를 취합해 분석한 통계를 소개한다. 지난 세기 끝자락부터 가장 많이 가르쳐온 텍스트와 저자의 순위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통계를 낸 곳은 ‘오픈 실라버스’라는 이름의 비영리연구기관이다. 미국 컬럼비아대의 공공 정책연구소 ‘더 아메리칸 어셈블리’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다. 대학 강의와 관련된 빅데이터 분석을 수행한다. 1995년부터 강의계획서를 수집해 현재 140개국에서 약 900만 개에 달하는 자료를 축적했다. 강의계획서는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문 자료에 한정돼 표본 대부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미권 대학이다. 데이터 분류를 마치고 현재 통계에 반영된 강의계획서는 605만 9천 459개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전체 텍스트 랭킹이다. 통산 1위를 차지한 책은 ‘영작문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글쓰기의 요소(The Elements of Style)』다. 코넬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윌리엄 스트렁크가 1918년에 초판을 냈고 이후 몇몇 공동저자와 함께 지속적으로 개정돼 100년 넘게 핵심 교재로 읽히고 있다. 2011년 <타임>에서 ‘100대 논픽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인문고전 중에서는 플라톤의 『국가』가 5위로 가장 순위가 높았다. 전공별로 보면 『국가』는 철학에서 4위, 정치학에서 14위를 차지했다.

 

영미권 국가 대학 강의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글쓰기의 요소(The Elements of Style)』와 『국가(Republic)』
영미권 국가 대학 강의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글쓰기의 요소(The Elements of Style)』(왼쪽)와 『국가(Republic)』

 

‘오픈 실라버스 프로젝트’의 ‘대학 강의에 가장 많이 쓰이는 텍스트’ 전체 순위표 양상은 각 전공분야의 ‘믿고 쓰는’ 기본 교재와 시간의 도전을 이겨낸 인문사회분야 고전으로 양분된다. 1위 『글쓰기의 요소』의 뒤를 이어 차례로 『작가의 레퍼런스(A Writer’s Reference)』(다이애나 해커, 낸시 소머스, 1989), 『미적분학(Calculus)』(제임스 스튜어트), 『인간 해부학과 생리학(Human Anatomy and Physiology)』(일레인 마리엡, 카챠 호언, 1989)이 2~4위를 차지했다. 각각 분야에서 검증된 기본 텍스트이면서 꾸준히 개정판이 나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5위 『국가』 뒤로는 고전의 향연이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6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9위),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0위),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2위),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3위),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20위),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21위) 등이 상위권에 줄지어 있다. 기원전 400년부터 20세기까지 당대를 대표한 정치적, 사회적 통찰들이다. 이들 저작은 각 전공 분야에서도 상위권에 올라 있다. 특히 사회학 5위, 정치학 10위, 철학 30위를 차지한 『공산당 선언』의 순위가 눈에 띈다.

 

1997-2017 사이 세계 대학의 영문 강의계획표 600만 샘플을 분석했다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은 셰익스피어와 플라톤

 

영문학 도서 중에서 가장 높게 랭크된 책은 최초의 SF 소설 중 하나로 거론되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다. 전체 8위다. 영문학 부문에서는 글쓰기 교재들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메리 셸리는 1818년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을 숨겨 익명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했다가 1831년에서야 본명을 밝혔다. 영미권 대학 수업에서 가장 많이 권장되는 문학텍스트가 여성 작가의 SF소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어서 14세기 영국 작가 제프리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가 전체 15위, 조셉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이 16위, 존 밀턴의 『실낙원』이 19위를 기록했다.

고전의 위상은 저자 순위표에서 더 두드러진다. 1위는 셰익스피어다. 오픈 실라버스에서 집계한 강의안 4만 8천 282개에 등장했다고 한다. 2위와 두 배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차이다. 셰익스피어의 저작이 도서 랭킹 상위권에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워낙 방대한 작품이 폭넓게 읽히고 있어 표가 분산된 탓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플라톤(2위), 아리스토텔레스(4위), 미셸 푸코(5위), 칼 마르크스(6위), 존 스튜어트 밀(10위), 제프리 초서(11위), 소포클레스(13위), 윌리엄 워즈워스(14위), 지그문트 프로이트(15위), 에드가 앨런 포(16위), 임마누엘 칸트(19위) 순이다.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1931-2019).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 대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문인이다. 사진=영문 위키피디아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1931-2019).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 대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문인이다.
사진=영문 위키피디아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의 존재감

 

아울러 강의안에 등장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40여 명’의 숫자를 살펴본 오픈 실라버스의 분석 글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오픈 실라버스는 “전통적인 영미권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2017, 괄호 안 숫자는 노벨상 수상연도), 앨리스 먼로(2013), 도리스 레싱(2007), 헤럴드 핀터(2005) 등이 자주 읽혀 승자로 분류될 수 있는 반면 영국을 제외한 유럽 작가들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다만 서구 사회 바깥의 존 맥스웰 쿳시(남아공, 2003),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 1982), 윌레 소잉카(나이지리아, 1986),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 2010) 등은 영미 작가보다 많이 읽혔는데 이는 “노벨문학상위원회의 세계문학기조와 강단의 탈식민주의 문예 연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노벨문학상 작가 순위표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1993)이다. 그는 강의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노벨문학상 작가로 등장 회수가 2위 존 쿳시의 세 배에 달한다. “미국사회에서 흑인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굴레를 동시에 극복한”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저자 순위에서도 43위에 올랐다. 최소한 오늘날 강단에서는 허먼 멜빌이나 마크 트웨인을 앞서는 존재감이다. 가장 복잡한 억압을 가장 섬세하게 다룬 작가가 대학에서 가장 많이 읽힌다. 오픈 실라버스의 대학 강의계획서 통계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대학 사회의 본질적 물음을 다시 곱씹어 보게 한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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