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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이달주 展(4.6~6.12)
미술비평_이달주 展(4.6~6.12)
  • 조선령 부산미술관
  • 승인 2004.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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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감상성 제거한 균형감각의 매력

▲이달주 作, '비둘기와 소녀' ©
미술관에서 일하다보면 학교에서 배웠던 미술사의 연대와 현장의 연대에 격차가 심한 것에 놀라게 된다. 예를 들어 1970년대라고 하면 미술사에서는 극히 최근이지만 실제로는 1970년대 이전의 작품을 새롭게 접하기란 매우 어렵다. 1940~50년대 작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예전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란 무엇보다 한가하게 미술품 보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현대사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간 미술가들의 작품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도 크며, 자료챙기기에 꼼꼼하지 못한 우리나라 사람의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배경에서 볼 때 가나아트센터의 ‘이달주 전’은 무엇보다 한국현대미술사의 한 연결고리를 찾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43살 요절작가가 남긴 미술사의 공간

황해도 출신의 이달주는 1920년에 태어나 1962년, 43살의 나이에 요절한 작가다. 동경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전쟁을 만나 종군작가로도 일하는 등 다른 모든 이들이 함께 겪었던 한국현대사의 여정을 헤쳐 왔다. 종전 후 미술교사로 계속 일하면서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뇌일혈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특별히 화려한 기행을 펼치지도 않았고 첨단 유행의 일원인 것도 아니었으며 미술교사로 조용하게 살다갔던 이 작가의 작품은 그 후 서서히 잊혀져 갔다. 이번 전시에는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을 위주로 총 11점의 작품이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모두 통틀어도 20점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단 11점의 작품, 그것도 자기만의 세계를 완전히 구축하기 전에 요절해버린 작가의 작품 11점만을 보고 작가의 세계 전체를 논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서 이야기를 해본다면, 작품들의 첫 느낌은 다소 절충주의적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물항아리를 이고 가는 소녀라는 ‘목가적 풍경’의 소재주의가 느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아리’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형태를 반추상화하는 조형실험이 섞여있다. 하지만 어차피 미술의 기법이나 구성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그리고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과거란 그다지 우호적이거나 연속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절충성이란 어떤 면에서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문제는 절충의 시도에서 오는 긴장관계를 스스로 창조해내고 또 스스로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아니면 갈등이 종료된 상대로 단지 장식적으로 제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달주의 작품들은 겉으로 보기만큼 절충주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 작가에게서 엿보이는 것은, 향토색과 모더니즘적 실험을 조화시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두 가지가 만나는 곳에서 하나의 공간을 설정하는 것, 소재로도 기법으로도 환원되지 않기에 오히려 중립적 실험이 가능한 공간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작가 자신이 의식적으로 이런 면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화면에서 관찰되는 것은 그렇다. 작가가 이 공간 속에서 행한 실험은 주로 색채와 마티에르가 만나는 효과에 대한 것이다.

조형 실험적 의지와 목가성의 온화한 결합

거친 붓질과 나이프 덧칠을 통해 만들어진, 부조를 연상케 하는 두꺼운 마티에르는 얼핏 박수근의 것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박수근이 형체를 뚜렷이 드러내지 않는, 안개와 같은 정서적 효과를 위해 마티에르를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이달주의 작품은 밝은 색채들의 겹침이 마티에르 효과를 통해 중화되는 현상 자체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정서적 효과는 오히려 여기서 미미한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샘터’나 ‘비둘기와 소녀’와 같은 작품을 보자. 이 작품들에서 짧고 두꺼운 붓질들은, 목가적 세계의 정서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빛의 반사를 통한 대기의 효과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노랑, 갈색, 초록, 푸른색 같은 서로 충돌하는 색들이 무수한 겹쳐지는 가운데 개별적인 색의 채도는 중화된다. 두터운 마티에르는 얼핏 무겁고 물질적인 느낌을 줄 것 같지만 애초에 사용한 색의 채도 덕분에 그다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오히려 이런 추상적인 조형의지다. 긴 목과 긴 얼굴을 가진 물 긷는 소녀들은 마치 정물처럼 그려져 있다. 목가적 풍경이라는 소재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소재주의적인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구 모더니즘에서 받아들인 미술의 자기지시성이 모더니티의 체험부재에서 오는 ‘순박한 눈’과 결합될 경우 무언가 안정적이지 않은 효과가 나오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일 것이다. 이달주의 경우도 추상에의 의지는 이런 ‘순박한 눈’을 넘어설 만큼 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서적인 면이 화면구성에 의해 뒤로 물러나 있다는 것은 첫인상과는 다른 면모를 작품에 부여해준다. 그러면서도 화면이 생경한 실험에 머물지 않고 전체적으로 온화하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작가의 독특한 점이다. 조형 실험적 의지와 목가성이 비교적 온화하게 결합되는 것은 극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균형감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균형감각이란 때로 단점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장점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균형감각은 갈등을 덮어가리는 해결책이 되기보다는 불필요한 감상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물화에서 이런 작가의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대담한 붉은 색면의 지배가 두드러지는 정물화 ‘고엽’이나 소품이지만 안정감 있는 ‘소라’ 같은 작품에서,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화면을 은은히 받쳐주는 색채감각과, 내적인 차가움과 외면적인 온화함을 조화시키는 안정된 조형감각이 느껴진다.      

조선령 /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필자는 홍익대 미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재현의 붕괴, 생성의 표현: 들뢰즈와 탈구조주의 미술이론의 정립’, ‘이승조, 엄밀한 구조로서의 추상’, ‘회화의 타자: 현대미술에서의 사진의 위상을 보는 한 가지 시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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