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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리뷰_『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미술문화 刊| 2004| 448쪽
주간리뷰_『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미술문화 刊| 2004| 448쪽
  • 장민한 서울대
  • 승인 2004.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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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미술은 죽었다...다원주의 비평의 길 모색

이 책에서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이라는 테제를 통해 오늘날의 미술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생산이 멈췄다는 의미도 아니고 새로운 예술의 창조 가능성이 고갈됐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다고 예술이 철학이 됐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서구에서 미술(예술)의 개념이 출현한 이래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술사를 발전적인 거대한 내러티브(great narrative)로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내러티브가 종말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종말 이후 시기의 예술은 더 이상 나가야할 특정한 내적인 방향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는 시기, 즉 다원주의 시기라고 진단한다.

팝 아트의 등장을 통해 일상 사물(예컨대 슈퍼마켓에 진열된 브릴로 박스)과 이것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예술작품(워홀의 ‘브릴로 박스’) 중 어느 것이 예술작품인지 눈만으로는, 즉 지각적인 성질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예술의 본질을 탐구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것을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믿고 있었던 예술가들은 팝 아트의 등장 이후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제는 예술가의 과제가 아니라, 철학자들의 과제라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이제 예술가는 예술의 본질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더 이상 추구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예술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든, 어떤 정치이념을 표방하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단토는 보는 것이다.

단토의 예술종말론은 오늘날 예술이 나아가야 할 특정한 역사적 방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오늘날은 어떤 형태를 지녔든지 관계없이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전자의 주장의 정당성은 예술의 발전적 내러티브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고, 후자의 주장은 예술 비평에서 가치평가와 양식의 문제와 관련해 검토해볼 수 있다.

전자와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단토의 내러티브가 자신의 자의적인 목표가 아닌 타당한 근거에서 세워진 목표라고 할 수 있는가다. 왜냐하면 예술의 목표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내러티브가 만들어질 수 있고, 그 내러티브에서 포섭할 수 있는 다양한 발전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토는 자신의 내러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미술 생산의 객관적인 역사적 구조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그 구조를 자신의 이론이 잘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단토의 주장은 예술이라면 필연적으로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분석하고 있는 서구의 미술사적 구조에 놓여진 예술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단토의 예술종말론은 모더니즘의 프로젝트가 내적으로 붕괴되고 다원주의가 발생했다는 것을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주장이 경험적 주장이라면 지금까지의 예술의 진행 과정을 보다 더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모델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토의 후자의 주장은 모더니즘 비평이 몰락한 이후의 비평의 빈 자리를 채워준다고 볼 수 있다. 다원주의 시대의 예술비평은 그 이전 시대의 비평처럼 ‘예술이 무엇인가’ 라는 이론적 반성에 구속된 비평을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비평의 임무는 개별 작품들이 제각기 추구하는 목표, 작품들의 의미, 그리고 의미를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미술가들은 자신만의 표현적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지(예컨대 동굴벽화, 바로크 초상화, 중국의 산수화의 양식, 다른 작가의 작품의 이미지 등) 이용할 수 있다. 다원주의 비평은 하나의 양식을 옹호하는 형식의 비평이 아니라 사용한 이미지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그리고 작가가 무엇을 나타내려고 그 양식을 이용하는지 추론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장민한 / 서울대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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