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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전집
파울 첼란 전집
  • 교수신문
  • 승인 2021.01.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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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지음 | 허수경 옮김 | 문학동네 | 408쪽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탄생 100주년 기념 전집

“부모를 죽인 살인자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남은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이 언어 발굴의 구덩이를 보라,
발설이 곧 침묵이 되게 하는 힘을 견뎌보라, 허수경의 첼란을 견뎌보라.”
김혜순(시인)

“모든 시는 자전적이지.
나는 내 존재와 무관한 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어.
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내 방식대로 리얼리스트라네.”

_ 파울 첼란, 1962년 6월 23일, 어린 시절의 친구 에리히 아인호른에게 보낸 편지 中

 

2020년 한 해 동안 독일 문학출판계는 물론,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사용 국가들 주요 매체의 문화 관련 키워드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파울 첼란’이라는 이름이었다. 1920년 11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태어나 1970년 4월 파리의 센강에 투신하기까지, 오로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간 파울 첼란의 탄생 100주년이자 사망 50주기가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952년 첼란의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펴낸 이래 오늘날까지 출간해오고 있는 안슈탈트 출판사는, 『양귀비와 기억』 수록작이자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견되는 ‘세기의 시’로 일컬어지는 「죽음의 푸가」를 통해 첼란의 생애를 돌아보는 책 『죽음의 푸가: 어느 시의 전기』(2020년 3월)를 출간했으며, 첼란 생전에 그의 후기 시집에 해당하는 『숨전환』(1967)과 『실낱태양들』(1968)을 펴낸 데 이어 센강에 투신하기 전까지 준비중이던 시집 『빛의 압박』(1970)을 비롯한 유작들을 차례로 정리해 펴내온 주어캄프 출판사는, 2003년 초판을 출간했던 『주석판 첼란 시집』의 두번째 개정증보판을 내놓았고, 『파울 첼란: 1934-1970 사적 편지들』을 시작으로 전기와 회고록, 연구서 등 2020년 한 해에만 10여 종 가까이 첼란 관련 기획을 선보였음은 물론, 2021년과 2022년에도 첼란 관련 연구서 2~3종의 출간을 예고하고 있다. 2000년에 이미 첼란 생전의 시집과 사후의 시집은 물론 산문과 연설문, 첼란이 동경하고 높이 평가했던 해외문학작품들에 대한 그의 독일어 번역, 유고로 남은 미출간 원고, 육필 원고 사진 등을 총망라해 일곱 권짜리 ‘파울 첼란 전집’으로 펴냄으로써 첼란 작품 이해와 연구의 출발이 될 텍스트 정리 작업의 기반을 다진 것은 물론, 2003년 첫 권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총 열여섯 권으로 완간되어 첼란 작품사와 생애사 연구의 결정판으로 자리매김한 ‘보너 아우스가베(Die Bonner Ausgabe)’를 보유하고 있는 주어캄프 출판사로서는 당연한 행보일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의 역사를 지닌 땅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읽고 쓰기 시작해 독문학과 언어학을 공부하기에 이른 유대인. 나치 독일에 의해 집단학살수용소로 끌려가 수용소에서 병사한 아버지와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 “부모를 죽인 살인자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남은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시를 쓰고 남긴 유대인 시인. 그는 네번째 시집을 낼 즈음에 이르러서야 브레멘 문학상과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독일문학계’의 주요한 두 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럼에도 전후 독일 사회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와 보수주의 분위기는 유대인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 겪고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은 유대인 시인에게 한편으론 실존의 불안을 야기하는 근원이 되었으며, 실제로 전후 독일문학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주요 비평가들로부터 그는 ‘현실과 거리가 먼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그릇된 평가까지 받게 된다. 유대인 시인으로서 독일어로 시를 쓰며 독일문학계에 수용되어 인정받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또하나의 실존적 전쟁이나 다름없었던 그가, 50여 년의 짧은 생애 동안 한 번도 독일에 ‘거주’한 적이 없는 그가, 사후 50년을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상처 입은 생존자’ ‘아우슈비츠 이후, 독일어권 전후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쉼없이 호명된다. 시인은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곳”에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머물고 있다.

 

내 손에서 너는 커다란 꽃을 집어든다:
꽃은 희지도, 붉지도, 파랗지도 않다-그럼에도 너는 꽃을 집어든다.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곳, 그곳에 꽃은 언제나 머물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있었던 적이 없어서, 그렇게 우리는 꽃의 곁에 머문다.
_ 「가장 하얀 비둘기가」 中 / 『양귀비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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