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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美를 논하다 8_대화성의 미학
우리시대 美를 논하다 8_대화성의 미학
  • 이원곤 단국대
  • 승인 2004.06.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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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과 시행착오의 시대, 불확정적인 코드와 소통하라!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 예술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대화’와 ‘상호소통성’의 단절때문이었다. 이제 우리시대의 예술가들은 여러 방식으로 모더니즘의 딱딱한 틀을 뛰쳐 나오고 있다. 관객과 언어를 섞거나, 작품 속에 여러 캐릭터를 넣어서 다성성이 울려 퍼지게 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자칫 이어붙이기에 머물 뿐 진정한 소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탐색해본다.

교회의 司祭라는 직업이 있다.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교의 권위가 퇴색하고, 예술가들이 이전의 사제와 유사한 지위를 차지한 것이 이른바 ‘근대’라고 생각된다. 예술가는 그 천재적 영감으로 세계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간파하고, 마치 사제가 신의 말씀을 전하듯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 신성한 물건은 미술관에 소장되고 관객은 마치 성지순례를 하듯이 미술관이라는 신성한 교회에 와서 경건한 자세로 거기에 표현된 코드를 읽고,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인의 교양이었다.

하지만 늘 불확정적이고 애매하거나 이중적인 코드를 통해 표현되는 예술작품을 해독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관객들은 작품 앞에서 자신의 여러 규범(code)을 동원한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다양한 코드가 동시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비로소 납득이 가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것이 이른바 어려운 현대미술의 감상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이 미술을 ‘새로운 인식을 발생시키는 게임’으로 성립시키는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규범이 반복되면 곧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원래의 불확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규범은 좀더 자유도가 높은 것으로 대치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돼 드디어 관객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하게 되면, 결국에는 진짜 ‘작품’과 단순한 ‘엉터리’를 구별하기도 힘들어진다. 남겨진 것은 ‘천재’와 마찬가지로 서로 단절되고 고립된 관객들뿐이다. 따라서 ‘소통을 위한 매개물로서의 작품은 존재하지 않고 고립된 환상만이 남는다’는 것이 이른바 ‘예술의 종언’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다. 현대미술에서 소통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푸념이 자주 되뇌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이 결코 자립적인 객체로서의 구조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관객상호간에 얼마나 코드가 공유될 수 있는가 하는, 지극히 유동적인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구조와 소통방식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미술에서의 상호연결과 수평적인 교류를 주로 하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탄생하게 한 원인일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상호연결과 수평적 소통관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은유는 잭슨 폴록에게서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액션페인팅’, 수평방향으로 퍼져 가는 場, 그리고 지표면에 구획 지워진 공간은 바로 변형과 의미창조를 위한 기반이다. 그의 線들은 힘차게 얽히고, 갈라지고, 결합하고, 충돌하고, 교차하고, 짜여지는 장을 만들고, 그 공간은 관객을 포옹하면서 끌어들인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에는 작자성을 무효화하는 익명적인 감각이 있으며, 관객을 의미창조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고 대화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상호소통의 시대이다. 예술작품은 오브제가 아니라, 관객을 포함하는 시스템이 된다. 즉 예술작품의 의미는 관객과의 대화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인터랙티브 아트’라고 불려지는 것들은 관객을 각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에게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클릭해라’, ‘보턴을 눌러라’, ‘마우스를 작동해라’ 등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규칙의 단순한 강제집행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이 관객과 대화하는 게임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감추어진 코드를 부단히 각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지금은 혼란과 시행착오의 시대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구조와 변형(transformation)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 행위는 세계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은유의 배후에 궁극적이고 확고한 현실의 기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이다. 즉 모든 것은 은유며, 끊임없이 새로운 은유를 탐색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사료된다. 단 그것은 상호대화를 통해 의미가 창조되는 컨텍스트 안에서만 유용한 구조이며, 여기서 예술가는 그것이 창조되도록 돕는 사람이다. 결국 예술이란 태도의 문제며, 이를 위해 많은 연기와 퍼포먼스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학도들은 현재의 자신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연기하는, 즉 놀이 혹은 게임의 기술을 습득하여야 할 것이다.

이원곤 / 단국대 미디어예술론
필자는 미디어아트 전공으로 일본 스쿠바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저서로는 ‘영상기계와 예술’, ‘영상예술’, ‘디지털화 영상과 가상공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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