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4:35 (토)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40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40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4.06.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청학련'과 나의 출국금지

<붕괴 위기에 직면한 유신정권은 학생들의 순수한 민주화 요구를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탄압했습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가공의 단체를 조작하여 이를 용공세력으로 몰고 '대통령긴급조치'를 발동하여 학생들을 군사법정에 세우고 사형을 포함한 엄청난 형벌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민청학련사건'의 진상입니다.>

위의 글은 '실록·민청학련 1 1974년 4월'이라는 저서의 '머리말'의 일부이다. 이 책은 '민청학련운동 계승사업회'에서 엮어서 2003년 11월에 학민사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은 유보선 전 대통령을 위시하여 필자 20명이 당시를 회상하며 각각 자기의 입장에서 소위 '민청학련' 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그리고 함선생님의 지난 회에 소개한 글에서도 "이번의 학생운동에 기독학생이 중심이 됐다는 것은 주의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신대로 이 책의 필자의 한 사람인 나상기 님이 당시의 한국기독학운동총연맹의 학생회장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정리되어야 할 중대한 사건이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1973년도 부활절 합동예배가 남산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때 기독학생 간부 30여명은 헌금 바구니에 '유신독재 물러가라' 등의 시국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넣어 돌린 소위 '남산 부활절 사건'이 민주화 운동의 실질적인 효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때 이 사건을 주도한 지도자가 박형규 목사님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KSCF학생회장이었던 나상기 군이 주동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다.

나의 기억으로는 당시 기독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서 추진된 학생운동은 주로 성명서 작성 배포 및 데모들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성명서를 내는 주관기관을 무어라고 써야 하느냐가 학생들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KSCF의 명의는 아무래도 피해가 너무 클 것이 예상됨으로 즉석에서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 사건의 총책임자였던 이철 님의 글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거론됐던 명칭들은 '유신에 저항하는 모든 학도들', '반파쇼민주학생연맹', '반독재전국민주학생연맹' 등이었다. 그러나 명칭만큼은 '안티체제의 성격보다는 지향점과 정체성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 정하게 됐다. 특히 '청년'을 붙인 것은 우리의 투쟁이 대학생들에 한정되지 않고 전 계층적인 투쟁이 돼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청학련사건에 관하여 상세하게 그 전말을 소개하는 것은 본고에서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생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 20명 중의 한 사람인 정상복 님의 글 중에 내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그 대목을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나의 입장에서 서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상복 님의 글을 직접 읽어보기로 하자.

<얼마 지나 보안사로 불려가 카페트가 깔리고 사면의 카페트로 방벽을 한 고문실에 끌려가 나병식 씨에게 준 자금이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서 나온 자금임을 자백하라고 서너 시간 동안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이들은 무지막지하게 고문을 하는 사람들이다. 지치면 다른 사람이 교대하고 또 지치면 사람을 교대하면서 죽든지 말든지 그냥 두들겨 패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는 그 부분을 잘 넘겨서 안도를 했는데 나중에 되게 당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심장병이 걸릴 정도의 불안한 날을 보냈는데 그것은 김용준 박사와의 관계다. 김용준 교수는 고대에서 기독학생회 지도교수로 관계를 맺었는데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을 할 때 간사로 들어가 KSCF 대학부 간사로 일하게 되어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된 분이다. 김 교수님은 1974년 이사장으로 총무 일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사무실에 와서 당시로 꽤 많은 돈을 주셨다. 당시 나는 학생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느라 돈이 많이 필요할 때인데 아무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불쑥 돈을 주어 얼마나 고맙고 요긴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왜 돈을 주느냐 묻지도 않았고 누가 준 돈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보안사에서는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기로 한 김 박사님을 출국정지시키고 집요하게 나와의 관계를 추궁하고 있었다. 구치소 방에 햇빛 그림자가 방 중간을 지나면 대개 그 날 출정이 없기 때문에 한숨을 돌리는데 그 지점을 지나기까지 정말 가슴을 태우며 매일 매일 심장이 두근거리는 심장병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대공분실장인 김판길 중령이 보안사에서 나와 마주앉아 사나이 대 사나이로 이야기하자면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김용준 박사와 나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오늘 최종적으로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종결짓고 내일 출국시킨다고 했다. 나는 초죽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으로 버텨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절대로 관련이 없다고 항변했다. 결국 더 이상 추궁을 당하지 않았고 김 박사님은 일본으로 출국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정상복 목사(현재 기독교대한 감리회 교육훈련원 원장으로 있다)의 글을 읽으면서 고마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74년도 나의 수첩을 보면 3월 13일 오후 여섯시에 'KSCF workshop'이라고 적혀있다. 당시 KSCF는 총무의 사표가 수리되고 임시로 이사장인 내가 총무직까지 대행하고 있었는데 당시 간사로는 정상복 목사 이외로 안재웅 님(현재 아세아 기독교협의회-약칭 CCA- 총무로 홍콩에 주재하고 있다)과  이직행 님 이렇게 셋이 있었다. 이미 앞에서 밝혔던 바와 같이 총무대행으로서 KSCF 재정상태를 살펴보니 일년 예산의 90% 이상이 해외 지원금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와 같은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의 6개 교단을 회원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협의회(NCC) 산하의 유일한 학생운동협의체인 KSCF가 예산의 90% 이상을 외국 원조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못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세 간사와 하룻밤을 YMCA호텔에서 묵으면서 앞으로 KSCF의 재정문제를 위시해서 운영정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워크숍을 가졌던 것이다. 그 결과로 세 간사는 각각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그리고 경기·중남·강원도로 분할하여 각각 지역을 전담하고 그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소위 토착화 작업을 벌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정상복 간사는 경상도 안재웅 간사는 전라도 그리고 이직행 간사는 중부를 전담하는 것으로 정하고 당시 남아 있는 예산을 중앙 본부용의 최소 한도의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예산을 3분하여 각 간사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연장자인 이직행 간사에게 이사장 유고 시에는 총무대행의 역할도 맡도록 결정을 보았다. 이와 같은 정책적 결정은 사실은 민청학련운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KSCF 사무당국의 정책결정이었다. 정상복 목사가 내가 돈을 주었다는 것은 이 결정에 따른 예산 분배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세 간사에게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의 예산을 각각의 책임하에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치상황에서 민청학련운동은 진행되고 있었고 그 중심에 KSCF가 서 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 세 간사의 수중에 있었던 예산이 그후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는 지금까지 나는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다.

급기야는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고 KSCF 세 간사가 차례로 구금되어 갔는데 정상복 간사는 끝까지 체포되지 않고 용케 피신하고 있었던 어느날 밤 정간사가 야밤에 우리집을 찾아 왔기로 그때 내 수중에 있었던 돈을 주며 가능한 한 피신하여 구금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와 함께 눈물의 작별을 고한 일도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나 자신도 언제 체포될지 전전긍긍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되도록 종로 5가 기독교회관 7층 사무실을 지키며 상황 돌아가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 고려대학 김상협 총장은 일본 와세다대학과 맺은 자매결연에 따른 제 일차 교환교수를 나를 지명하였고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1년간 파견되기로 발령을 내리고 있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는 이공학부가 대단히 유명한 대학이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으론 공학부장직을 갓 마친 미국의 대학교 학위를 가지고 있는 내가 가장 적격이라는 결론에 의한 조치였다.

1974년도 나의 수첩에는 군데군데 당시 민관식 문교부 장관과의 약속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민 장관과의 연락은 끊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나는 4월 11일 아침에 김포비행장으로 나갔다. 집을 떠나기 전에 민 장관과 중앙정보부 판단기획실장 김영관 씨와 전화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는 비행장에서 패스포트를 몰수당하고 비행기에 실었던 나의 짐을 내리느라고 비행기 출발이 늦어지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다시 되돌아오고 말았다. 요새 흔한 말로 출국정지가 된 것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