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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애’와 ‘말다툼’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
‘자매애’와 ‘말다툼’이 동시에 필요한 이유
  • 정민기
  • 승인 2021.01.15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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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
미셸 딘 지음 | 김승욱 역 | 마티 | 528쪽

글이 자신의 이름이 될 때까지
날카로운 글을 쓴 12명의 여성 작가
남성들의 편견과 조롱 이겨내

“여성 작가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 너무 착하게 굴면 안 된다. 둘째, 요절해야 한다. … 셋째, 버지니아 울프처럼 자살해야 한다. 계속 글을 쓰는 것, 그것도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국의 칼럼리스트이자 소설가인 레베카 웨스트(1892∼1983)가 1952년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쓴 말이다. 영국은 1928년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그때 웨스트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그러나 웨스트에게는 투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작가로서 인정받는 것, ‘글이 만든 세계’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웨스트는 예순이 넘어서도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여성이 쓴 글은 ‘중요한 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20년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영국보다 8년이나 앞서지만 ‘글이 만든 세계’의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수전 손택(1933∼2004)은 새아버지에게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결혼을 못할거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메리 매카시(1912∼1989)는 <뉴욕 타임즈>의 한 필자에게 “오, 매카시… 몹시 공평하고 똑똑한 여자로구나”라는 비아냥거리는 문체로 한 페이지 내내 조롱을 받았다.

이미지=마티 출판사

남성 중심이었던 출판계

이 책은 한 세기 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 12명의 여성 작가들을 다룬다. 그들은 <뉴요커>, <에스콰이어>, <타임>, <보그> 등 뉴욕의 신생 신문사와 잡지에 칼럼을 쓰며 ‘글이 만든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출판계는 남성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남성 편집자들은 여성 작가에게 시의적이고 중대한 사건을 맡기지 않았다. 

여성작가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경로는 패션이나 여성잡지 뿐이었다. 호텔에서 생활하면서 뉴욕의 주요 인사들과 ‘알곤퀸 원탁 모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도러시 파커(1893~1967)는 여성잡지 <보그>에서 패션 사진 밑에 들어갈 짤막한 글을 쓰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여성 작가들의 흔적을 쫓으며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12명의 여성들이 서로를 흠모하며 존경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말다툼을 벌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 운동에 ‘자매애’가 필요한 만큼 ‘말다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과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가치 있는 지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12명의 작가들이 글을 쓴 매거진. 이미지=마티 출판사

열린 태도로 논쟁한 그들

저자가 주목하는 두 번째 지점은 이 책의 여성들이 20세기의 훌륭한 논쟁들에 거침없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12명의 여성들은 ‘틀릴까봐’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날카롭게 주장하고 열린 태도로 논쟁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틀렸다고 판명날 경우 깔끔하게 인정했다. 

예컨대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인종차별 철폐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아렌트의 주장에 숨겨진 허점을 밝혀내면서 비판하자 아렌트는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주장을 철회했다.

이 책의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20세기 뉴욕에서만큼 자유롭게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특히 페미니즘 진영에서 자매애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논쟁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12명의 여성들의 삶을 엮으며 20세기에도 이들과 같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치 않고 열린 태도로 논쟁을 벌이는 여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민기 기자 bonsens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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