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2:55 (금)
맹목은 이성을 잠식한다
맹목은 이성을 잠식한다
  • 심영의
  • 승인 2021.01.11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영의의 문학프리즘]

분노가 맹목적 광기로 이어지지 않아야
가장 나쁜 쪽은 양비론을 펼치는 일부 지식인들, 언론인

지난해 말미에 교수신문은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 이성이 마비된 채 모든 잘못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맹목적 태도가 불러온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일종의 죽비라 하겠다. 물론 둘 혹은 그 이상이 엉켜서 싸움을 할 때는 무슨 사정이 있기는 할 것이고,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그 사정을 들어보면 어느 한쪽이 잘못했거나 좀 더 나쁘거나 그 차이는 분명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진대 우리는 종종 싸우는 자들 모두가 다르지 않다면서 양쪽을 다 비난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짐짓 자신은 오염된 세상에서 청청한 듯, 저 홀로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하는 현자처럼 위선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사례가 잘 드러나는 소설로 이문열 단편소설 「필론의 돼지」가 있다.

「필론의 돼지」에서 주인공이라 할 인물은 군에서 제대한 다음 군용열차를 타고 귀향길에 오른다. 그런데 각반을 두른 일단의 현역병들이 열차에 올라 폭력을 휘두르면서 제대병들에게 돈을 뜯는다. 모두 황당해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기세에 눌려 군소리 없이 돈을 뜯기고 있는 중에 누군가 한 용감한 사람의 선동으로 제대병들은 분기한다. 그리고 ‘나쁜’ 현역병들을 모질게 집단구타하기에 이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필론이라는 현자가 폭풍으로 흔들리는 배속에서 보았다는 돼지를 떠올린다. 폭풍으로 흔들리는 배안에서 사람들이 공포와 절망에 빠져있을 때 돼지는 태평하게 쿨쿨 잠을 자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제 군용열차 안에는 어떤 대의가 아니라 눈먼 증오와 격양된 감정만이 있었다. 현역들은 ‘나쁜’ 놈들이지만 나중에 보니 제대병들은 ‘더 나쁜’ 놈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태를 방관한다. 쿨쿨 잠을 자는 돼지처럼.

소설의 해석이야 달리할 여지는 있다. 필자는 ‘옳지 않음에 대한 분노’가 맹목적 광기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만 매몰될 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비이성적인 말들이 넘쳐나는가를 보자. 변창흠 국토부장관 후보자의 인간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면피용 사과를 연발했으나 그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불러 세운 청문회장에서 야당의원들이 노트북 앞에 펼쳐 보인 구호들, “개돼지나 아무나 장관하나” 라고 묻는 말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져버린 것이다. 술에 취해 잠든 자신을 깨웠다고 택시운전자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법무부차관을 옹호하면서 여당 법사위원이 했다는 말, “누구라도 잠을 깨우면 화가 난다”는 끼리끼리 의식은 눈물겹기만 하다. 조국 전 장관 일가에 가해진 검찰의 과잉수사와 재판부의 가혹한 판결엔 상식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 전 장관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로 비유하고 있는 어느 인사의 말엔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모욕감을 느낀다. 기생충 연구자로 알려진 어느 교수가 새해의 소망으로 “유 아무개가 폭삭 망하고 죗값을 치렀으면 좋겠다”는 저주의 말을 서슴없이 발설하는 것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눈 먼 맹목의 결과다. 나는 저들 모두가 본래는 저렇게 비이성적인 존재일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 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는 둘 다 옳지 않다고 읽어내는 일부 지식인들의 태도는 위선적이다. 잘못이 더 많은 쪽을 비판하고 잘못이 상대적으로 적은 쪽의 과잉을 경계하는 것이 지식인의 올바른 책무라고 본다. 가장 나쁜 쪽은 양비론을 펼치는 일부 지식인들, 언론인들이다. 눈 부릅떠 바로 보는 대신 자신의 진영의 이해에 포박당해 있기 때문에 이성적 성찰을 기대하는 것은 새해에도 난망(難望)하겠다.
  

심영의(문학박사. 소설가 겸 평론가)
심영의(문학박사. 소설가 겸 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