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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 色, 그대로 박생광 展(4.6~6.12)
미술비평_ 色, 그대로 박생광 展(4.6~6.12)
  • 김현숙 덕성여대
  • 승인 2004.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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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의 색, 날 것의 감각을 통한 해탈의 체험

코리아나 화장품의 복합문화공간인 스페이스 씨에서 박생광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色, 그대로 박생광’전(5.8-6.12)이 열리고 있고, 올 9월에는 박생광 전문 미술관인 이영미술관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이 준비 중이다. 전시회 개최와 더불어 박생광의 일본 행적관련을 비롯한 新자료 발굴과 소장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담은 책자가 이영미술관 주도로 발간될 예정이다. 박생광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해 전문가 및 대중에게 인지도를 심화?확산시키려는 사전 작업이 치밀하게 계획돼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박생광 전을 통해 해외의 뜨거운 반응과 찬사를 재확인한 바 있는 이영미술관은 탄생 1백주년 기념전을 ‘국민작가 박생광’ 창출의 계기로 삼으려는 듯 하다.

서구인의 ‘발견’이 없었다면 박생광에 대한 오늘날과 같은 평가가 가능했을까. 1970년대의 한국화단에서는 추상미술이 국제성을 갖춘 보편 언어이자 세련된 고급미술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며, 색감에서도 무채색류의 단색조 일색이던 시절이었다. 채색을 왜색으로 인식해 斥色思潮가 팽배했으며, 수묵화에 비해 채색화는 상대적으로 저급한 영역으로 멸시 당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때에 박생광은 화단의 경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민속 문화에서 형과 색을 끌어내 작품에 원용하기 시작했다. 박생광의 작품양식이 궤도에 오르면서 몇몇 지인들의 이해를 얻기도 했으나 그 진가가 반석 위에 오르게 된 것은 예기치 못한 극적 사건에서 비롯됐다. 후두암 판정을 받은 얼마 후 프랑스의 ‘85그랑팔레 르 살롱’전 특별 초대작가로 선정된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신으로부터 받은 보상이라고 하겠다. 당시 르 살롱전 출품작가 선정을 위해 내한했던 불란서 미협회장 토트리브는 박생광의 작품을 본 그 자리에서 초대작가로 선정했고 별도의 독립공간을 마련해 박생광 특별전을 개최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 국내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외국인의 평가가 자국의 평가를 유도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서구의 평가가 보증수표가 돼 국내에 유통되는 현상은 서구에 대한 종속 관계를 노정시킨다는 점에서 경계돼야 하지만, 때론 가려져 왔던 부분, 억압되어 왔던 부분들이 타자의 시선에 의해 발견되고 해방되는 긍정적 측면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가까운 예로 현재 국민작가로서 칭송을 받고 있는 이중섭과 박수근의 경우가 있다. 이중섭 은지화의 독창성이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미국의 근대미술관(MOMA)이 은지화를 영구 콜렉션으로 소장하면서부터였고, 박수근의 작품 역시 외국인들에 의해 한국적 미감이 발견되고 수요가 창출됐다. 물론 외국의 평가 자체만으로 이들이 국민작가의 대열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신재료를 사용한 모든 작품과 한국적 소재를 다룬 모든 작품이 외국으로부터 상찬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외국 미술계의 평가를 겸허하게 수용할 필요는 있다.

1977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 박생광은 종전에 쓰던 ‘乃古’라는 호를 ‘그대로’로 바꾸고, 작품 제작년도를 서기에서 단기로 바꿔 표기하기 시작했다. 순 한국어로 호를 사용하고 단군을 한국사의 시점으로 계산하는 단기법을 썼다는 것은 ‘우리의 것’에 대한 강한 애정의 발로이자 민족관의 적극적 현시였다고 하겠다. 또한 작품의 소재와 색감을 탈춤, 토기, 자수, 나전칠기 문양, 불상, 탱화, 단청, 민화, 부적, 무당 등에서 끌어낸 것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작품 방향의 급전환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쾌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1970년대 중후반에 우리나라에 민중문화운동이 일어나 민속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1980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국가주도의 ‘國風’ 행사가 벌어지는 등 국수적 이념의 조장을 위해 한국적 전통이 이용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시류가 직간접적으로 박생광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한편 박색광의 작품이 한국적이라는 것을 넘어 한국성의 원형이자 한국적 색감의 원형이며 한국적 순수를 표방한다는 평가는 다소 수정할 필요가 있으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박생광의 그림이 뛰어난 점은 한국적 소재를 취했다는 자체가 아니라 한국적 소재에 혼을 불어넣음으로써 소재주의를 극복했다는 점 때문인 것이다. “잘 생긴 것을 내 나라에서 찾고 마음은 인도에서 찾고…” 라는 박생광의 언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1982년 인도 여행 이후 화풍이 크게 진전돼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접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한국의 민속적 소재를 환영과 실재가 혼재하는 초월적 시공간으로 이끈 것은 인도의 민족종교인 힌두교의 신비를 영적으로 체험한 결과였던 것이다. 한국의 무속과 불교가 하나의 공간에 혼존하는 독특한 종교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정통과 이단이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 모순이 되는 사상과 교의가 공존하는 힌두교에 대한 직관적 통찰을 통해 가능했다.

한국인의 원초적 색감이라고 일컬어지는 박생광 회화의 색채가 한국의 무속적 색감에 근원을 두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적 존재의 현시를 암시하는 강렬한 남색과 보라색, 주홍색 윤곽선이 간여하는 색 배합 등은 민속적 색감을 그대로 원용한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문화의 색을 녹여낸 독창적 차원이다. 바탕에 아교와 먹을 혼합해 칠하고 그 위에 석채를 가함으로써 작품의 밀도와 표현력을 높인 것이 일본 채색화법을 응용한 것이라는 점고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감각과 기법에 의해 한국의 민속적 색감이 강화됐음을 간과해서는 박생광의 진면목이 오히려 훼손될 우려가 있다.

박생광의 그림은 날것의 색, 날것의 감각을 통해서 해방과 해탈을 체험하게 한다. 한국적인 날것을 한국과 인도, 한국과 일본, 한국과 서양의 경계가 없는 초월의 공간에 옮겨놓음으로써 모든 인류의 밑바탕에 흐르는 원초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김현숙 / 덕성여대 미술평론가

필자는 홍대에서 ‘한국근대미술에서의 동양주의 연구 -서양화단을 중심으로’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미술과 사실성 나무가 되고 싶은 화가’, ‘박수근 근대를 보는 눈’, ‘한국 근대미술 유화’, ‘한국의 미술가들-박래현’,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등이 있다.

●박생광의 예술세계

乃古(그대로) 박생광(1904~1985)은 불화?무속화 등의 토속적인 이미지들을 단청의 강렬한 빛깔로 재해석해 새로운 작품세계를 창조해낸 화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나이 여든이 되기 전까지 그의 작품들은 일본화풍이 깊이 침투돼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1984년 개인전에서부터 자기 고유의 방법을 획득하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게 된 것. 이때부터 박생광은 부적, 무녀와 같은 샤머니즘과 일련의 불교적 이미지들을 화면 가득히 중첩시켜 기존 화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원핵, 황?청?백?적?흑을 사용, 神氣와도 같은 주술적인 힘을 펼쳐 보였다. 굵고 마디진 선획과 이미지의 전면화현상, 그리고 탄력적인 구성은 불화나 민화적인 형식에서 직접적인 감화를 받았음을 보여줘, 지금은 전통적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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