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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적 현대예술에 대한 미학적 비평 논의
다원주의적 현대예술에 대한 미학적 비평 논의
  • 이승건
  • 승인 2020.12.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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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 | 아서 단토 지음 | 김광우, 이성훈 옮김 | 미술문화 | 448쪽

형식주의 예술비평의 한계 인식
예술의 철학과 실천에 주목
예술 이데올로기 시기의 멸망

책의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 이라니요! 아니, ‘종말 이후’(After the End of Art) 랍니다! 다시 말해, 예술은 끝났으며 그 이후에 대해 작심하고 한 마디 하겠답니다. 

저자가 누구 길래 이렇게 강한 어조로 나서고 있는 걸까요? 이 책의 저자 단토(Arthur Coleman Danto, 1924~2013)는 대학에서 예술과 역사를 공부한 뒤, 다시 대학을 옮겨 철학을 전공하며 대학원에서도 철학을 수학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1950년대 초반부터 자신의 핵심 전공을 살려 철학과 교수(컬럼비아 대학)를 지냈으며, 미국 철학회 회장 및 미국 미학회 회장을 역임한 예술과 철학을 넘나드는 흔치 않은 학문적 이력을 소유한 학자입니다. 특히 미국의 학계에서는 찾아보기 드물게 유럽의 철학에 기대어, 동시대 미술로부터 괴리되어 왔다는 비판을 받는 미국 미학의 전개과정 속에서 과도하게 추상화 되어버린 형식주의 예술비평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동시대 예술의 철학적 성질에 주목하면서 예술의 실천적 활동(1984년부터 『네이션』 잡지의 미술비평 담당)에 대한 접근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시도한 미학자이기도 합니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 ‘예술의 죽음’이나 ‘회화예술의 종언’에 대한 주장은 ‘70년대 말부터 종종 있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Hans Belting, 1935~ )은 『미술사의 종언』(Das Ende der Kunstgeschichte, Munich, 1984 / The End of the History of Art?, translated by C.S. Woo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에서 기존의 보편적이며 통합적인 개념을 추구해 온 미술사학의 위기적 상황을 인식하고,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미술사의 정태적인 개념으로부터의 개방과 새로운 미술사 방법의 수립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단토의 경우, 당시 미국 학계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으로부터 헤겔적인 역사주의로 전회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논의를 미술사의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철학과 예술에 대한 변증법적인 사고를 통해 ‘예술의 종말’과 ‘그 너머의 지평’까지를 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점이 여느 예술의 종언론자와는 크게 다릅니다. 

- 한스 벨팅에게 권두언 이미지

이 책에서 단토는 그간의 미국 미술비평계를 주도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의 모더니즘 예술관 및 형식주의 미술비평관을 요목조목 따져가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이 대두되어 풍미하고 있는 1960년대 앤디 워홀의 팝 아트로부터 ‘80년대 설치미술 및 차용미술 등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과 이 신종 예술의 개념에서도 조차 포괄하지 못하는 ‘90년대 당대의 예술’(contemporary art)에 대해 다원주의(pluralism) 입장에서 다종다양한 현대의 미술을 After the End of Art-Contemporary Art and the Pole of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 Updated Edition, 2014)(이성훈ㆍ김광우 역, 『예술의 종말 이후 :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미술문화, 2004, 448쪽 분량 / eBook, 2015)라는 다소 도전적인 제목으로 옹호하고 나섭니다. 특이한 점은 그가 『예술의 종말 이후』의 큰 프레임을 헤겔로부터 뽑아낸 점입니다. 즉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에서 설명한 역사 모델 ― 정신이 자기인식을 통해 절대정신으로 향해 전개해 가는 과정을 세계역사로 보는 ―을 예술사의 전개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단토는 예술의 역사도 정신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의식화 해 가는 과정임을 주장하며 그 과정은 예술이 철학으로 지양됨으로써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합니다. 

단토가 이 책의 권두화로 삼은 이미지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에서 오려낸 한 장면을 약간 수정해서 찍은 스틸 사진(번역본, 8쪽)입니다. 수정 작업은 화가 데이비드 리드(David Reed, 1946~ )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히치콕 감독이 영화의 신빙성을 보태기 위해 침대 위에 걸어놓았을지도 모르는 특징 없는 호텔 그림이 있었던 원래 자리에, 자신의 그림(〈#328〉, 1990) 중 하나를 호텔 침실 장면 속에 집어넣었습니다(화면 오른쪽 위, 1995). 이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리드의 작품이 오리지널 영화에서처럼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양 너무도 자연스럽습니다. 이렇듯, 단토는 기존의 명작을 모방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본래의 오리지널 작품과 어디가 다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현실, 다시 말해 탈 모더니즘의 에피소드에 속하는 어떤 작품들은 그 작품에 대응하는 실재를 결여한 채 모방하는 행위만을 되풀이 하고 있는 사큘라크르의 아트화로서 현대예술의 다원주의적 단면을 제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예술의 종말’은 단순한 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운동들의 종말과 선언문들의 종말’을 의미합니다(한국어판 서문, 10쪽). 다시 말해, 그가 주장하는 예술의 탈-역사적(post-historical) 시대(112쪽)에 들어서면서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이 걸어 온 배타적인 예술사의 에피소드, 즉 선언문의 시대로서 특정한 종류의 운동과 특정한 종류의 양식만을 확정해서 이것만이 유일하고 중요한 예술이라고 간주하며 그 경계 밖 예술들을 모조리 제거한 예술의 이데올로기 시기의 예술이 멸망했다고 지적합니다(91쪽). 

이 지점에서 저자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2)를 예술의 종말을 고한 시금석으로 평가합니다. 〈브릴로 상자〉는 시지각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두 개의 사물 중 왜 하나는 예술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입니다. 특히 식별 불가능성이란 문제는 오직 철학에서만 다룰 수 있는 철학 고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순수한 철학적 형식의 질문에 속하는 것이므로, 결국 〈브릴로 상자〉가 제시하는 문제는 예술(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지성)의 문제임을 주장(93쪽~94쪽)하며, 이 작품으로부터 컨템퍼러리 예술의 다원주의적 성향이 시작됐다고 강조합니다(152쪽).  

앤디워홀의 <브릴로 상자>(1962)를 모방한 마이클 비들로(Mike Bidlo, 1953~ )의
<앤디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아님>, 1995, 36쪽

다음은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저자가 논의하고 있는 그린버그식 모더니즘 미술론(비평관)에 대한 비판 및 동시대 예술에 대한 단토의 미학적 주장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ㆍ인상주의 미술을 모더니즘의 출발로 보는 견해에 대한 비판 : “인상주의 캔버스는 전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그것은 그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결국 인상주의는 바자리적 의제의 지속이다. 즉 인상주의는 빛과 그림자 사이의 자연적인 차이들을 갖고서 시각적 외관을 정복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127쪽)라고 보아, 그린버그와는 달리 인상주의를 모더니즘 미술이 아닌 시각적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모더니즘 미술 이전’의 미술로 보고 있습니다.

ㆍ모더니즘 미술의 순수성에 대한 비판 : “모더니즘 문화가 끝나게 되는 것은 형태, 표면, 물감 등과 같이 회화를 그 순수성 속에서 정의 내려 주는 것들에만 관심을 쏟은 모더니즘이 너무 국지적이고 너무 물질주의적이었기 때문”(61쪽)이라고 비판한 후, 그린버그의 미술사의 내러티브에는 아카데미화와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가 ‘역사적 경계 밖’으로 내 몰렸다고 비판(50쪽) 합니다. 더욱이 “그린버그주의적 잣대를 들이댈 때 컨템퍼러리 미술은 모두 다 순수하지 않은 것”(52쪽)으로 몰려 현대미술의 장에서 제거되는 논리를 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ㆍ추상표현주의 이후의 그린버그식 미술사 전개에 대한 비판 : 단토는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미술사를 색면추상에서 멈춰 버린 점을 지적(50쪽)한 후), 그것은 ‘배타적인 역사적 내러티브’(281쪽)라고 공격하면서, “그린버그가 깨달았던, 예술작품은 한갓된 실제 사물 사이의 딜레마가 더 이상 시각적인 용어로는 언명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리고 물질주의적 미학을 벗어나 의미의 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역사적 명령이 되었을 때, 모더니즘이 종말을 도달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팝아트의 도래와 함께 일어났다”(162쪽~163쪽)고 하여, 1992년 여름 뉴욕에서 그린버그가 한 소집단을 상대로 한 강연 내용, 즉 “미술의 역사상 아마도 미술이 이렇게 천천히 움직였던 적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07쪽)는 그린버그의 언급을 강조하면서, 단토는 그린버그가 언급한 30년 동안 팝아트를 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바 그린버그식 비평의 순수주의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예술의 종말 이후』는 배려 깊은 원저자 단토 선생께서 새로 작성한 한국어판 서문과 공동역자 각자의 전문성을 갖춘 역자해설 2편이, 마치 별책 부록처럼, 현대예술이론서를 접하는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 책의 앞과 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한국어판 편집의 이와 같은 친절함에, 이 책의 독해가 좀 더 수월했다고 생각되는 독자가 있으시다면, 단토의 또 다른 저작 『일상적인 것의 변용』(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1 / 김혜련 역, 한길사, 2008)과 『철학하는 예술』(Philosophizing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 정용도 역, 미술문화, 2007)의 독해에도 한 번 도전해 보아,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는 듣지 못한 동일 저자의 다른 각도에서의 현대예술에 대한 다원주의적 미학적 담론에 흠뻑 젖어 보심은 어떠실는지요?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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