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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창신의 신념…‘을유1945 서체’를 만들다
법고창신의 신념…‘을유1945 서체’를 만들다
  • 김재호
  • 승인 2020.12.14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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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75주년 을유문화사_『을유1945』 서체 가이드북 | 을유문화사 | 111쪽

창립 75주년 맞아 서체 개발 기념사업 추진
첫 책 역시 한글의 글씨체 연습책 
홈페이지 리뉴얼로 아카이브 구축

‘을유문화사’ 하면 기자에겐 『서양철학사』가 바로 떠오른다. 철학 공부를 한다는 사람치고 이 책을 안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또한 을유세계문학전집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일은 을유문화사의 창립기념일이었다. 올해는 을유문화사가 75년째 되는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런 을유문화사가 창립 75주년을 맞아 을유1945 서체 가이드북 『을유1945』를 펴냈다. 

1945년 을유문화사는 『가정글씨체첩』을 처음 세상에 선보였다. 이 책은 한글 글자의 모양을 바로잡고 글씨를 연습하기 위한 책이었다. 을유문화사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신념으로 삼아 책을 출간해오고 있다. 즉,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정신이다. 이번에 을유문화사가 국내 순수 단행본 출판사 최초로 전용 글꼴을 만들었다. 전통을 재발견하면서 서체를 개발하는 것은 법고창신 신념에 걸맞은 기념사업이다. 

그동안 아모레퍼시픽이나 현대카드, 배달의민족, 조계종 등 각종 단체가 전용 서체를 개발했다. 하지만 정작 글꼴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출판사가 새 서체를 만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2019년까지 ‘텍스트 기반 콘텐츠 제공자’가 제작한 공공 배포 폰트는 △ 리디북스의 리디바탕체 △ 네이버의 나눔글꼴 △ 미래엔(전 대한교과서)의 대교체와 각종 손글씨체 등이 있다. 전용 서체를 개발한 안그라픽스는 출판사이면서 서체를 비롯한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작업하는 회사다. 따라서 을유1945체는 순수 단행본 출판사가 만든 국내 최초의 전용 서체라 할 수 있다.

순수 단행본 출판사의 첫 서체

본래 한글 명조는 중국과 일본에서 붓으로 쓰던 한자 해서체와 닮아 있다. 그런데 그 명칭이 해서가 아니라 명조로 붙은 연유가 불분명하다. 가장 대표적인 한글 서체인 명조체의 뿌리와 정체성이 모호한 것이다. 이에 명조체의 정체성을 처음부터 다시 탐구한 결과물이 을유1945체이다. 서체 개발을 담당한 윤민구 디자이너는 명조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해 을유문화사의 서고에 있는 여러 고서를 열람하면서 다양한 순명조 한자를 수집했고, 기하학적으로 날카로운 순명조가 실용성을 겸비하게끔 현대 명조체(해서체)와 접목시켰다. 

이 글꼴은 도형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명조의 틀을 따라 수평, 수직, 대각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도 붓글씨가 주는 옛 느낌을 덜어냈다. 그래서 과도기적 양식을 과감하게 따르면서도 현대적 미감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윤민구 디자이너는 이 작업을 ‘과도기적 명조’라고 부른다. 사라진 명조의 본질과 현대의 감수성을 절충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전통 속에서 현대를 꽃피운 을유1945 서체는 지난 1일부터 을유문화사의 새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어떤 용도로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을유1945 서체를 개발한 윤민구 디자이너는 단순함으로 명쾌한 서체가 되도록 고민했다. 사진 = 을유문화사

유지원 타이포그라피 연구자는 「을유1945』의 「책의 정신과 육신에 기여한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을유1945 서체의 제작은 우리 책의 역사에서 책의 발행 주체가 한때 오랜 사명이었다가 희미해진 활자체 개발 업무를 아주 오랜만에 직접적으로 실천한 일이라고 기억될 것 같다”라면서 “을유문화사는 외부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을유년을 기념하는 이름을 여전히 간직하고, 사라져 가던 우리말과 우리 글, 우리 역사와 우리 문화에 양분과 생기를 채워 왔다”라고 적었다. 

윤민구 디자이너는 「을유문화사 서체의 탄생」에서 “단순함이 곧 명쾌함으로 바로 연결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그렇게 해석되는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했다"면서 "글자체 또한 쓰임을 통해서만이 의미와 가치가 생긴다고 믿는다”라고 밝혔다. 

한편, 을유문화사 홈페이지 역시 새롭게 선보였다. 새로운 홈페이지는 현대적인 레이아웃과 복고적인 감성을 결합시켰다. 특히 을유문화사가 판매 중인 도서에 대한 정보는 물론, 『가정글씨체첩』과 『조선말큰사전』 등 근·현대 출판문화를 이끌어 온 을유문화사의 옛 도서들을 소개하는 ‘아카이브’ 코너를 통해 역사적 가치를 더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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