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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과 장애가 동일시 되면 주홍글씨 새겨진다”
“의존과 장애가 동일시 되면 주홍글씨 새겨진다”
  • 김재호
  • 승인 2020.12.1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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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역사』 l 킴 닐슨 지음 l 김승섭 옮김 l 동아시아 l 359쪽

농인 대학교에 첫 농인 총장이 나오다
장애의 반대는 능력 있는 몸일까
개인적 결함 넘어 공동체를 지향해야

“질환과 장애는 동의어가 아니다.” 우리는 아픈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단정짓진 않지만, 장애인이라고 하면 으레 아픈 사람으로 치부한다. 아픔 때문에 장애가 나타나기도 하나, 그 아픔이 사라진 후에도 장애나 후유증이 오래가는 경우도 있다. 『장애의 역사』를 쓴 킴 닐슨 톨레도대학교 교수는 역사학 전공자다. 그는 장애학 프로그램의 학과장을 맡으며, 장애의 역사와 역사의 장애를 연구해왔다. 닐슨 교수는 인종, 계급, 젠더를 넘어 장애를 렌즈로 삼아 민주주의의 변화를 살펴볼 때라고 강조한다. 

1988년 갈로뎃대학교 학생들이 농인 총장을 요구하며 대학을 점거했다.
이 대학은 농인을 위한 미국의 첫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사진 = 동아시아

유색인종이 돼 보지 않는 이상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온몸으로 언급하긴 쉽지 않다.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계급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계급의 밑바닥에 닿아보지 않은 이가 부조리한 사회의 이야기를 글로만 배우고 말로만 외치는 건 한계가 있다. 젠더의 갈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인 닐슨 교수는 전형적인 엘리트 미국 백인 여성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책을 쓰는 동안 딸이 장애를 가지게 되어 큰 충격에 빠졌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닐슨 교수 본인도 어렸을 적 언어 장애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자신의 모든 이론은 이제 개인적 실존이 되었고, 더 성숙하게 되어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1864년 농인을 위한 미국의 첫 고등교육기관인 갈로뎃대학교 설립됐다. 그런데 농인을 위한 학교의 총장은 124년동안 언제나 청인이었다. 1988년 3월 초, 갈로뎃대학교 학생들은 이러한 비장애중심주의적 전통에 맞서 ‘지금 당장 농인 총장’을 외쳤다. 그 결과 첫 번째 농인 총장이 그해 3월 13일 임명된다. ‘장애=불평등’이라는 공식을 시민 불복종으로 극복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장애의 반대를 온전한 몸으로 생각한다. 책에는 ‘능력 있는 몸’으로 번역돼 있다. 번역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장애의 역사』를 번역한 김승섭 고려대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는 “이 책은 장애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온전한 시민의 자격을 갖춘 ‘능력 있는 몸(Able-Bodiedness)’을 정의하고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결핍된 혹은 퇴행적인 몸이라고 규정해온 권력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며 “‘능력 있는 몸’은 정치, 경제, 법, 문화를 포함한 삶의 전 영역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고, 그 불평등은 인간의 몸에 다시 질병과 상처를 남겼다”고 밝혔다.  

장애는 불평등이라는 부조리 사회

그 예전 토착민 사회에선 장애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아예 ‘장애’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토착민 사회에서 중요한 건 몸과 영혼, 정신의 조화였다. 그래서 농아이건 맹인이건, 팔이 하나 없건 일상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몸-영혼-정신이 조화롭지 못하면 낙인이 찍혔다. 닐슨 교수는 “농인으로 태어난 어린 소녀는 수어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녀의 청인 가족들은 자신들 역시 나이가 들어 청력이 약해지면 수어에 의존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라며 “장애는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그런데 15세기경 북아메리카에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장애에 대한 개념과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가져온 질병과 문화는 토착민들의 세계관과 충돌했다. 서구적 개념으로 무장한 건강과 의학은 토착민들에게 강요됐고, 군사적 갈등 속에서 질병, 탐욕이 늘어나면서 장애에 대한 편견 역시 생겨났다.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하던 토착민들은 개인의 결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허나 개인이 중시되는 서구의 개념은 인지적 결함이 장애로 간주됐다. 

심지어 장애를 가진 애를 낳은 엄마는 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됐다. 가부장제와 신학적 권위 앞에서 장애는 죄라는 은유와 상징으로 작동했다. 아울러, 장애는 법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됐다. 미국의 독립혁명 후에는 부적합한 몸을 가진 이들을 규정하고 교육, 관리하는 시설들이 급증했다. 정신적 무능 때문에 투표권을 박탈 당하는 일도 늘어났다. 

몸과 영혼의 조화에서 부적합으로

『장애의 역사』에서 주목할 것은 ‘의존’에 대한 고찰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산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의존과 동일시한다. 이때 장애에는 주홍글씨라는 낙인이 찍힌다. 닐슨 교수는 “의존의 뜻으로 이해되는 장애는 독립과 자치로 대표되는 미국의 이상적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의미를 갖는다”라면서 “장애는 단순히 신체적 범주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범주다”라고 밝혔다. 

닐슨 교수의 주장은 한 마디로 장애라는 개념 역시 계속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와 장애인의 역사가 존재한다. 책의 부제는 ‘침묵과 고립에 맞서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다. 표지에는 점자가 새겨져있다. 그 뜻은 ‘장애의 역사’와 ‘장애 자부심’이다. 『장애의 역사』는 미국 중심으로 쓰였다. 한국사회에서 과연 장애는 어떤 역사를 지녔었는지 살펴보는 건 시급한 연구과제로 느껴진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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