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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의 변증법…정주 속에 유목, 유목 속에 정주
산책의 변증법…정주 속에 유목, 유목 속에 정주
  • 김재호
  • 승인 2020.12.03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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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 『도시와 산책자』 l 이창남 지음 l 사월의책 l 376쪽

철학적 총체성 상실한 현대의 산책
대중문화와 분리될 수 없는 산책과 산책자
부유하는 산책이지만 삶의 윤리 만들어가

도시의 유목민. 우리들은 왜 도시를 끊임없이 배회하는 것일까. 최근작 『도시와 산책자』는 역사와 문화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산책의 변화사를 추적했다. 이로써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대도시가 형성되면서 조용한 산책은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산책으로 달라졌다. 이 책을 집필한 이창남 경북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유럽과 동아시아 대도시들에서 실제 산책했던 벤야민, 크라카우어, 캘러만, 이상, 박태원, 나혜석, 바크비츠 등의 산책을 중심으로 산책이 왜 어떻게 변해갔는지 추적한다. 

애초에 산책은 느리고 사색을 위한 어떤 종교적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누구나 느끼듯이 그러한 여유를 느낄 시간과 공간이 이제 부족하다. 이 교수는 "합리화가 진행되고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면서 느린 보행은 비합리적이고 한가로운 행동으로 치부되었고, 개인과 사회는 목적 합리성에 종속되어 갔다"라고 적었다. 종교적 신앙과 철학적 총체성을 상실한 현대인. 나부터 산책은 강한 이끌림보단 부유(浮遊)함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어디를 기어나가서 걷고 싶다. 

대 자본의 상징적인 건물로 인식된 꿈고 같은 파리의 파사주. 사진 = 사월의책

체계와 일상의 긴장인 산책

그렇다면 산책은 무엇일까? 이 교수는 "산책은 ‘체계(거시적)’와 ‘일상(미시적)’ 사이의 긴장과 교착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행동양식"이라며 “산책자 인간군상은 민족, 계급, 젠더와 같은 사회과학 범주의 주체라기보다는 그렇게 범주화하기 어려운 유동성이며, 일정한 틀에 가두기 어려운 삶의 여백이다”라고 적었다. 더 나아가 산책자는 “직업, 계층, 취미, 젠더 등 여러 측면에 교차된 복합적 형상”나 “탈주체적 주체의 대펴적 형상”으로 정의된다.  

현대의 인간은 왜 그리 떠다니고 싶은 것일까? 이 교수는 루카치(1885∼1971)의 선험적 실향, 발터 벤야민(1892∼1940)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1889∼1966)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문제로 설명했다. 하지만 한가로운 산책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자리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는 대중에게서 강하게 솟구친다. 이 교수는 “우리는 ‘정주 속에 유목’하고, ‘유목 속에 정주’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현대인의 산책은 일시성, 우연성, 순간성이 특징이다. 보들레르(1821∼1867)는 「지나가는 여인에게」에서 “끊임없이 유예되는 만남의 특징”을 시로 표현했다. 이러한 만남이 지속되는 건 공허감을 남긴다. 하지만 군중이 된다고 해서 절대 고독에만 휩싸이는 건 아니다. 군중은 공허한 개인을 감싸주기도 한다. 

꿈과 유토피아로서 파리의 파사주

그런데 산책은 문화상품과 분리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욕구를 해소한다. 유행은 마치 산책과 같이 군중들 속에서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처럼, 나이면서 동시에 남이고자 하는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다. 상품으로서 길을 상징하는 것은 ‘파사주’이다. 파사주는 양쪽으로 즐비한 상점들 사이에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유리지붕 아래 길들을 뜻한다. 여기서 유리는 상징성을 갖는다. 유리는 안과 밖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길들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어 유토피아 혹은 꿈과 같은 이미지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파리의 근사한 백화점 안쪽 길을 떠올리면 된다. 파사주는 일종의 ‘실내의 대로’, ‘갤러리형 거리’, ‘온갖 소규모 잡상인이 모이는 집합소’이다. 이 교수는 “18세기 말부터 건축되기 시작하여 유럽 각지에 널리 퍼진 파사주는 1850년 경 쇠퇴하고 백화점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면서 “그러나 파사주는 몰락한 부르주아의 꿈처럼 벤야민에게 근대 자본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인식되고 있다”고 적었다. 

『도시와 산책자』의 9장은 독자들을 1930년대 경성으로 데려간다. 근대도시이자 식민도시인 경성. 도시공간라는 것은 산책과 산책자들의 보행을 통해서 의미가 부여된다. 저자인 이창남 교수는 도시공간이라는 것이 물적 지표들뿐만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이뤄지는 역독성에 의해 고유한 의미가 부여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상의 시들과 박태원의 소설을 통해서 그 역동성을 살펴본다.

이 교수는 “이상과 박태원은 작가이기 이전에 유목하는 도시대중 속의 개인이었으며, 그들을 둘러싼 대중의 형상도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으로 작품 속에 자리하고 있다”라며 “특히 이들의 산책에서는 제국도시의 산책자들과 다르면서도, 그것을 모방하고, 전유하며, 동시에 저항하는 식민도시 산책자들의 독특한 역동성이 드러난다”라고 적었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표현은 바로 ‘유랑’이다. 1930년대 경성의 작가이자 지식인이자, 피식민으로서 이들은 유랑의 산책, 산책의 유랑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도시와 산책자』에 따르면, 경성엔 일본인들이 약 4분의 1을 차지했다. 이외에 중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근대와 현대의 경계에 있던 1930년대 경성은 식민지 현지인들에게는 정말 낯선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주목할 풍경은 ‘모던걸’의 등장이다. 특히 모던걸의 패션은 눈총을 받았지만, 산책자로서 모던걸이 부여한 역동성은 파장을 일으켰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전통을 벗어나는 모던걸의 등장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함께 등장한다. 

산책과 산책자가 만드는 혁명

현대의 산책은 대중문화 속에서 재편되고 재생산된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산책 공간 역시 대중문화의 하위문화로 자리 잡지만 그 안에서 대중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시와 산책자』 43쪽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현대적으로 가공된 도시 경관을 내면화하고 창발적으로 재생산하면서 유목적 대중의 일상에 참여한다. 내면성이 되어가는 외면성, 초월성을 대신하는 세속성을 도시는 재생산하고 있다.” 

이 교수는 산책자의 윤리가 삶의 윤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적었다. 산책자와 도시대중은 상당 부분 중첩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는 “거리의 산책자로서 우리는 자아이자, 다른 자아들의 타자이며, 이 자타의 관계는 오늘날의 특수한 대도시와 기술적 조건 속에서 독특한 포스트모던적 사회성을 구축한다”라며 “산책자들의 작은 이야기들은 거대 서사의 이면을 가로지르고, 이들의 시선은 외면과 내면이 몸을 바꾸어 피부가 된 영혼을 응시한다”고 적었다. 산책과 산책자가 조용한 혁명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매우 걷고 싶어졌다. 도시를 산책하다 보면, 어느내 나는 직장인에서 문화를 변주하는 유목민으로 재탄생해 있을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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