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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맥락에서 서구중심주의 성찰해야
동양적 맥락에서 서구중심주의 성찰해야
  • 이진우 계명대
  • 승인 2004.05.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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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 강정인 지음| 아카넷 刊| 2004| 586쪽

▲ © yes24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계에서 ‘오리엔탈리즘’만큼 커다란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킨 낱말도 없을 것이다. 서양의 전통적 사상과 문화를 통렬하게 비판한 후기 구조주의 사상가들과 그들이 사용한 개념들도 여전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적 힘에 있어서는 단연 이 낱말이 앞선다. 이 낱말은 자생적 학문에 대한 강렬한 요구에 부합해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기구조주의와 오리엔탈리즘 모두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자가 서양사상과 문명을 ‘안의 관점에서’ 내재적으로 반성하는 반면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중심주의를 바깥, 즉 非서구의 관점에서 비판한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물론, 서구의 현대사상인 후기 구조주의가 서양을 아무리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서양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비판이다. 서양에 대한 동양의 비판 역시 ‘동양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기를 타자화하는 '탈오리엔탈리즘'의 덫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려 하는 것인가. 서구중심주의는 도대체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라는 도전적이고 야심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강정인의 이 책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비교적 성실한 답변의 시도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서구중심주의란 무엇인가’, ‘서구중심주의의 사상적 전개’, ‘서구중심주의와 현대 한국의 정치사상’,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의 4부로 구성돼 있다. 서구중심주의의 사상사적 계보를 서술한 2부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서구중심적 세계관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밝힌 3부 역시 흥미롭지만, 이 책의 중심은 오히려 액자 역할을 하고 있는 1부와 4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연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가.

저자에 의하면 서구중심주의(eurocentrism)는 서구와 중심주의의 합성어다. ‘서구’는 협의로는 서구문명의 기원을 구성하는 서유럽을 그리고 광의로는 서구문명 일반을 의미한다면, ‘중심주의’는 특정한 지역의 문화에 존재론적, 인식론적,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는 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서구중심주의는 근본적으로 서구만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인식의 도구를 제공하며, 도덕적으로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서구예외주의’와 비서구문명에 유럽의 잣대를 적용하여 그것을 일방적으로 격하시키는 ‘오리엔탈리즘’의 두 축으로 구성된다. 서양 문명은 자신의 종족적, 인식론적, 도덕적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것’, 즉 문화적 他者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예외주의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이고, 非서구에 대해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지식과 편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은 문화적 제국주의의 권력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개념정의가 이렇게 명료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의 폐해가 그만큼 분명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저자는 “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하는가”라는 거듭되는 질문에 그것이 야기하는 ‘소외와 억압’ 때문이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이 아닌 서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틀림없는 소외이고, 우리가 서구문명의 우월성 및 보편성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서구의 문화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분명한 억압이다. 우리의 문제의식이 남의 것이 되고 또 남의 이론에 우리의 현실을 짜 맞춘다면, 우리의 현실은 서구중심주의에 의해 주변으로 내몰릴 것이 틀림없다.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됐다

서구중심주의와 그 폐해 사이에는 분명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서구중심주의의 폐해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사상사적 기원과 메커니즘이 밝혀졌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과 전략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담론전략들은 오히려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이 간단치 않음을 역설할 뿐이다.

예컨대 주변이 중심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인정하는 ‘동화적 전략’은 중심과 주변의 차이를 완전히 제거하고, 거꾸로 중심에 대해 주변에 문화적 특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역전적 전략’은 다른 문명의 편견을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획일적으로 타자화하는 ‘逆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리고, 중심과 주변의 융합을 추구하는 ‘혼융적 전략’은 융합의 기준과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 한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사후적 인정에 불과할 뿐이며,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가능케 하는 이항 대립적 차이를 겨냥하는 ‘해체적 전략’은 일상생활에서 작동하는 중심주의의 기능을 간과한다.

저자는 “서구학문에 익숙한 경우 자신들이 내면화한 서구중심주의”를 청산하고, “동양학문에 익숙한 경우 서구적인 것에 대한 과민하고 배타적인 경계의식”을 극복하라고 말하면서 혼융적 담론 전략을 제안한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그것을 넘어서겠다는 야심만만한 동기로 시작한 이 책이 조금은 ‘맥 빠진’ 대안으로 끝맺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서구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 또는 그 극복이 정치적 독립, 산업화(경제발전), 민주화보다 훨씬 더 지난한 과업”이기 때문일까. 나는 여기서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서구중심주의에 의해 산출된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서구중심주의에 의해 침윤된-동양의 관점에서 서양을 비판하지 말고, 후기구조주의가 서양을 서양의 맥락에서 해체하듯이 동양을 ‘동양의 맥락’에서 성찰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우리는 서구중심주의가 ‘권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의 형식과 메커니즘은 잘 설명하고 있지만, 서구에 특권을 부여하도록 만든 힘에 대한 설명에는 인색하다. 만약 서구중심주의의 힘이 근본적으로 ‘기술문명’,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있다면, 이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제시돼야 한다.

셋째, 만약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이 현대 서구문명의 폐해와 부작용을 극복하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서구중심주의의 너머(beyond)에 있는 대안이 제시돼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쪽과 저쪽, 동양과 서양을 이원론적으로 구별하는 이데올로기 논쟁을 그만두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는 일에 조금 더 매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제목과는 달리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구중심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의 진정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독일 아우스부르그대에서 '허무주의의 정치철학'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이성정치와 문화민주주의',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 '이성은 죽었는가 -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 '도덕의 담론',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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