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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시대, '남산'에서 장준하를 보다
긴급조치 시대, '남산'에서 장준하를 보다
  • 김용준
  • 승인 2004.04.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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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8

▲재판장에 선 장준하 ©

1974년은 년초부터 매우 분주하게 시작되었다. 정월 초하룻날 저녁에 나는 당시 고려대학교의 교무처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시의 문교부장관인 민관식 씨로부터 나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의 교무처장인 한만운 교수는 중학교 3년 선배일 뿐 아니라 물리화학을 가르치고 있는 분으로서 매우 신경이 날카로운 분이었다. 어떻든 한 나라의 문교부장관이 정초부터 한낱 대학교수인 나를 만나자는 데 놀랐다. 그래서 나는 초사흘날 저녁에 지정된 을지로 3가 어느 일식점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무전기가 달린 장관 전용차에 대기하고 있는 비서가 부리나케 드나들었지만 민 장관은 무전기를 통해 오는 모든 연락을 물리치고 무려 세시간이나 나와 만나는 시간을 지속했다. 화제는 기독자교수협의회에 관한 이야기였다. 독자들께서는 내가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을 거치게 되는 경위를 여러번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새삼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세시간이나 지속된 장관과 나의 만남은 매우 흡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에 대한 장관으로서의 의심은 풀린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열흘 뒤에 기독자교수협의회 몇 분과 같이 회동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매해 정월 초에는 기독자교수협의회 년회가 열린다. 그래서 그 해도 1월 8일에 수유리의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기독자교수협의회의 년회가 열렸다. 각 지방의 기독자교수협의회도 조직된 후라서 참석인원은 예년에 비해서 많은 편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의 회장은 노명식 교수였다. 그런데 세상이 다 아는대로 1월 8일은 저 악명 높은 유신헌법하의 대통령 긴급조치 1,2호가 선포되었던 날이다. 여기서 긴급조치 1, 2호의 내용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73년 12월 24일 종로 YMCA회관에서 발족된 '개헌청원운동본부' 및 '백만인 서명운동'에 관한 성명서에 대한 조치였다. 이 운동 핵심에는 장준하 백기완 계훈제 이부영등이 있었고 김수환 함석헌 김재준등이 이들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던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1월 8일 밤 몇 명의 형사들이 아카데미 하우스에 밀어 닥쳤다. 한참 진행중인 년회 심포지움에서 이들 형사들은 이제부터 몇몇 교수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24시간 감시체제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현재 나의 기억으로는 문동환 이문영 교수들에게 형사가 한 명씩 배치되었던 것 같은데 나에게도 형사가 배치되었다. 24시간 나와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밖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나를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형사와 협상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귀가한 다음에는 형사도 자기 집으로 귀가하기로 하고 내가 외출할 필요가 생기면 형사에게 전화로 연락하여 동행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학교에도 같이 출근하고 내가 학교에 도착한 후에는 형사는 자유시간을 갖기로 하고 내가 학교 밖으로 나가게 되면 연락해서 같이 외출하기로 약속이 성립되었다. 며칠을 이렇게 지내는 사이에 형사와는 매우 친숙해지기는 했지만 참 사람이 할 노릇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활도 며칠을 가지 못하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정월 13일 새벽으로 기억되는데 새벽에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시경에서 형사 세 명이 우리집에 들이 닥쳤다. 어안이 벙벙했다. 우선 나는 급해졌다. 나를 감시하던 성북서 형사에게 연락을 해주어야겠는데 이들이 그 전화도 못 걸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서 내가 연행된 곳은 시경이 아니라 남산이었다. 시경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원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앙정보부에서 몇 날을 보냈던 자세한 이야기는 새삼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한가지 육체적인 고통은 당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취조받는 동안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몸서리 쳤지만 어떻든 나는 꽤나 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지금도 지겹게 생각나는 일은 잠을 못자게 한 일이었다. 자기들은 교대해가며 밤새도록 최조하는데는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취조를 받으면서 그들의 신문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등등의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있고 그 행동대의 본부를 한국기독교학생운동 총본부라 할 수 있는 KSCF로 보았고 KSCF의 이사장인 나와 함 선생님과의 관계를 유추해서 나를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행동대의 총수로 지목했던 것으로 나의 머리가 정리되었다. 어떻든 정보부로 끌려가서 첫 번째의 신문이 서명자 명부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 학교다 KSCF다 또 후에 자세하게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고려대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교와의 자매결연으로 첫 번째 교환교수로 내가 와세다 대학교에 파견되기로 결정이 되어 그 준비관계 등등으로 망쇄되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몇 달 동안 함 선생님을 뵙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었고 KSCF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백만인서명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나 자신은 서명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 까닭은 주위의 학생들이 수없이 수사기관을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사장은 그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나부터 서명을 해놓으면 당국과의 대화가 몹시 어려워지기 때문에 서명을 보류하고 있던 참이었다. 까닭에 내게 서명인 명단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앙 정보부가 아닌가? 자기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얼마든지 고문을 해서라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대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며칠씩 계속되는 철야 신문에 지칠대로 지치면서도 한 시라도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쪽에서는 실수라도 또는 착오라도 이 쪽의 말꼬리를 잡으려고 그저 백지를 수없이 들이밀면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의 성장과정을 기억되는 한 하나도 빼놓지 말고 기록해서 제출하라는 식의 묘한 전술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마도 며칠 사이에 내가 써낸 글이 200자 원고지로 수 백장은 되지 않았을까? 마지막판에는 무슨 과장이라는 매우 험하게 생긴 자가 나타나서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땅에 무릎꿇고 앉으라고 소리 지르며 구타 직전까지 갔으나 웬일인지 때리기 직전에 나가고 말았다. 그때서야 나를 깨닫게 하는 일이 생각났다. 독자들께서는 함석헌 선생님의 담당요원이 나를 찾아왔었던 일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국화약의 기술고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뇌리에 스쳐갔다. 정보부장이 이후락 씨요 이후락 씨와 한국화약 김종희 회장은 사돈지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당시 중앙정보부 판단계획 실장인 김영광씨를 나는 한국화약을 통해서 한국화약 회장실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누었던 일 그리고 김영광 실장한테 한 두 번 불려가서 함석헌 선생님에 관해서 그리고 당시의 소위 운동권에 관하여 의견을 나눈 일들이 나의 뇌리에 떠올랐다. 당시는 아직 지금의 남산에 육중하게 세워져 있는 완전한 고문실 겸 취조실이 지하에 완비되어 있는 건물이 건설되기 전이었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저 비명소리를 지르는 피의자 장본인들이 결코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아닐 터인데 나에게는 손찌검 한번 하지 않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취조는 각각 집무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정한 취조실이 없을 리가 없지만 연행한 사람이 많았던가 또 그나마 대우를 받아서 특별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이 지난 무렵부터 심문의 강도가 약화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청장 밑에 달려있는 신호등은 부장 차장 판단계획실장 그리고 소속 국장 등의 재실여부를 항상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중앙정보부 연행사건에서 영원히 잊지못할 한 장면을 기록에 나기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취조중이라도 사람의 생리작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때로 화장실을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솜을 두툼하게 둔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은 장준하 선생과 마주친 일이다. 소변을 누면서 둘은 무언의 묵례를 교환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 전부였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장준하 선생을 대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장준하 선생과 묵례를 교환한지 하룬가 이틀 후에 나는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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