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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산책자
도시와 산책자
  • 교수신문
  • 승인 2020.11.1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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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남 지음 | 사월의책 | 376쪽

사람들은 도시를 걷기를 좋아한다. 도시 대로변을 걷고, 상점들과 음식점들이 늘어선 가로수 길을 걷고, 공원과 골목길을 특별한 뜻도 목적도 없이 걷는다. 산책자는 무엇을 꿈꾸며 그 길을 걷는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도 도시를 걷는 이들이 있었다. 파사주(아케이드) 진열창에 정신이 팔려, 지나가는 행인을 구경하며, 군중과 소음을 뚫고 걸었다. 산책은 오래된 행위이다. 그러나 루소가 말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가능했던 시대는 끝나고, 현대의 산책자들은 고립을 벗어나거나, 반대로 자기만의 고독을 확보하려 길을 나선다. 산책자는 뭔가를 찾으려 도시를 걷지만, 그 도시는 오히려 산책자의 내부를 점거한다. 도시와 산책자가 산책을 통해 맺는 관계는 이처럼 변증법적이다.

『도시와 산책자』는 그 자신 명민한 산책자들이었던 20세기 초의 발터 벤야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이상(李箱), 박태원 등의 시선을 통해 근현대 산책이 가진 의미를 탐색한다. 거북이를 끌고 한가하게 걷던 댄디 지식인의 산책은 바쁜 현대의 직장인, 오피스레이디, 외국인 여행자의 여가활동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이렇게 달라진 대도시 산책의 풍경에서 꽉 짜인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적 욕구와, 정신적 안식처를 구하는 현대인의 불안을 동시에 읽는다. 20세기 초 파리, 베를린, 경성, 동경의 산책자들도 이러한 유목과 정주의 이율배반적 꿈을 함께 추구한 존재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민족, 계급, 성별의 전통적 범주를 넘어 우리들 ‘산책자’의 일상을 구성하는 탈근대성, 대도시 사회문화, 현대적 삶의 정체를 묻는다. 그리고 그 답으로 개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하려는 희망이 현대의 유목적 삶에 여전히 녹아있음을 확인한다.

『도시와 산책자』는 도시문화와 도시사회학에 오래도록 관심을 기울여온 저자가 지난 10년의 시간을 쏟아 완성한 노작(勞作)이다. 저자는 과거 지식인­예술가의 산책과 현대 일상인의 산책 또는 유목적 삶에 어떤 차이와 공통점이 있는지 물음으로써 오늘날의 산책이 가진 의의를 조명한다. 느린 보행과 깊은 사색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산책은 합리성과 효율성으로 조직된 현대 도시적 삶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산책은 사라졌는가?

한 세기의 시차가 있지만, 벤야민, 크라카우어, 이상, 박태원, 나혜석 등은 전혀 다르게 변한 산책의 양상과 의미를 초창기부터 예민하게 의식한 이들이다. 저자는 이들이 남긴 퍼즐조각들을 통해 학계에서 자주 무시되곤 하는 현대의 ‘일상성’을 다시 구성한다. ‘도시’ 그리고 ‘산책자’는 그 일상성을 밝혀주는 키워드들이다. 과거의 산책하던 소수는 사라졌지만 거꾸로 그것은 도시 대중의 일반적 행위 유형으로 확산되었고, 대중의 개체화는 심화되었지만 그들에게서 상실된 공동체적 관계는 거리의 만남과 유대 속에서 재발견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산책의 역사, 도시경관의 변화, 정치경제적 조건 등을 빠짐없이 고려하여 이 과정을 재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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