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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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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20.11.0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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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크노 지음 |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344쪽

20세기 현대문학사의 빼어난 문인 레몽 크노(Raymond Queneau, 1903~1976)는 출판, 문학, 음악, 영화, 언어학, 수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고 이를 토대로 기막힌 실험작들을 발표해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걸작 『문체 연습Exercices de style』(1947)이 번역 불가능성이 제기되던 험난한 여정을 뚫고 드디어 한국에 번역됐다.

바흐의 푸가기법에 영향 받아 하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변주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한 작가는 일련의 과정을 거듭하며 ‘문체’의 변주를 통해 말 그대로 ‘99개의 얼굴을 가진 다면체 같은 책’을 내놓았고, 이후 연극과 음악 공연 등으로 각색되어 대중적으로도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문체가 뿜어내는 놀라운 변용과 변신의 힘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재미를 동시에 맛보게 한다. 또한 글쓰기라는 것이 문체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쓰는 이로 하여금 몸소 이 책에 구현된 문체들을 따라가며 그 잠재력과 상상력의 체급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처음 열두 편 구상했던 것에서 점점 문체를 새로 추가하고 카를만의 삽화와 마생의 타이포그래피가 더해진 화보판을 거쳐 1973년 수정된 버전의 신판을 내놓기까지, 크노의 『문체 연습』은 계속 연마되며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이 책의 이탈리아어판 번역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이 책은 그 자체로 수사학 연습이다. 그가 이 책을 생각해냈다는 것은 바퀴를 발명해낸 것과 같은데, 이걸로 누구든 원하는 만큼 멀리 갈 수 있으리라”라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걸작, 실로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라고 했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1947년 원서 초판 띠지에 실린 문구 “사람은 글을 쓸수록 달필가가 된다”는 말은, 이 책의 막강한 자장하에 이제 레몽 크노의 말로 자리매김되었을 정도다. 영문판은 유명 작가들의 수려한 번역으로 널리 이름난 바버라 라이트가, 세르비아어판은 슬라브어권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는 다닐로 키슈가, 독일어판은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있을 정도로 쟁쟁한 번역가이자 문인이었던 오이겐 헬름레가, 또한 체코어판은 독창적인 작품 창작과 특출한 번역가로 이름난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가 옮겼다. 이처럼 세기의 번역가-작가의 지성과 영혼에 불을 놓았던 이 책 『문체 연습』의 한국어판 출간은 한국 내 번역문학사에도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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