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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평전
저우언라이 평전
  • 교수신문
  • 승인 2020.11.0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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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욱 지음 | 민음사 | 364쪽

중국 공산당의 창당 멤버로 대장정을 지휘했던 저우언라이는 수많은 외교적, 정치적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업적으로 코민테른이 지원하는 ‘외인부대’ 세력과 마오쩌둥의 갈등을 정리한 것을 들 수 있다. 저우언라이는 이 싸움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고, 당의 지휘 체계를 안정시킴으로써 공산당이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시안 사건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2차 국공 합작’을 성공시켜 항일 공동 전선을 구성한 것 또한 저우언라이의 치적이다.

중국이 오늘날 국제 사회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계기는 단연 ‘미∙중 데탕트’였다. 국제 무대의 변방에 있었던 중국은 데탕트로 인해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는 저우언라이의 대표적인 외교 업적이다. 또한 인도,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이 참여한 ‘반둥 회의’에서 발표한 ‘평화 공존 5원칙’도 그에 못지않은 큰 업적으로 꼽힌다. 비동맹 운동 국가들을 비롯해 제3세계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역할이 컸다. 오늘날의 중국 정부는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투자를 선점하고 여러 국가들에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력은 초기 중국의 외교가 구축해 둔 관계 덕분이다. 저우언라이가 남겨 놓은 외교적 유산에 힘입은 셈이다.

건국 이후의 정치적 유산도 크다. 저우언라이는 건국 직후, 각 분야의 비공산당원 전문가들의 협조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통치 기구 ‘정치 협상 회의’의 운영을 책임졌다. ‘1차 5개년 경제 발전 계획’ 역시 저우언라이가 추진하던 핵심 과제였다. 새롭게 건국된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토대를 세운 것이다. 또, 과격한 마오쩌둥의 행보에는 적절히 제동을 걸면서 마오쩌둥이 추진하는 정책들의 부작용을 줄이려 했다. 이로써 저우언라이는 대약진 운동의 경제적 피해와 문화 대혁명의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이렇듯 저우언라이는 중국 건국의 주역이었고, 이후의 경제적, 정치적 안정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대내적 성과는 현재 경제와 산업 분야의 강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중국 국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문화 혁명을 주도한 사인방이 저우언라이에 대한 추모를 방해하자 이에 항의하는 중국 국민들의 운동이 제1차 톈안먼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런 큰 추모의 물결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사망 당시에도 찾아볼 수 없다. 저우언라이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것은 중국인뿐만이 아니었다. 외국인들과 외국 공관의 직원들도 추모에 함께했다. 미국에 소재한 유엔 본부에서는 그를 추모하며 조기를 게양했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국제 사회에서 저우언라이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미중 데탕트의 미국 측 실무를 담당했던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인 『중국 이야기』에서 저우언라이의 인품과 카리스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은 바 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역시 그의 유연한 정치적, 외교적 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국공 내전 당시 총부리를 겨눈 상대인 장제스조차도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과의 관계를 직접 챙겼던 것도 저우언라이였다. 북한 함흥에는 저우언라이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북한에 있는 유일한 외국인 동상이다. 저우언라이는 그 자체로 원활한 북중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중국 국민들뿐 아니라 그와 협상을 진행했던 타국의 인물들, 심지어 적으로 만난 사람들조차 저우언라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저우언라이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주목한다. 양측의 입장이 부딪치는 경우, 저우언라이는 양측이 체면은 차리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협상을 이끌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오랜 냉전 시대의 갈등을 깨고, 국제 정세를 평화적으로 바꾸어 내는 데에는 그의 이러한 조정자로서의 역할과 능력이 컸다.

오늘날 다시 미중 관계의 긴장감은 높아지고 있으며, 북중 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도 극심하게 변동하는 모양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리더십으로 공존과 평화의 국제 관계를 이끌었던 저우언라이가 오늘날 다시 소환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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