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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씨네로그] 되어 가는 인간에 관한 영화
[정재형의 씨네로그] 되어 가는 인간에 관한 영화
  • 정재형
  • 승인 2020.10.28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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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어떤 게 좋은 선택인지 묻는 영화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becoming) 존재

독일 톰 티크베어 감독 영화 「롤라런 Lola Run Lola」(1998)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이 얼마큼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을 한다. 주인공 롤라는 애인 마니가 처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이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녀가 행동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영화는 다 보여준다. 중요한 건 롤라의 경우의 수만 고려한 게 아니란 점이다. 롤라가 변함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며 결국 두 요인이 합쳐져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가설이다. 

영화는 서사를 주관적으로 펼쳐 보이는 예술이다. 이 작품은 영화의 특성을 잘 활용해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든 셈이다. 롤라의 에피소드들은 어쩌면 독립적인 영화들로 볼 수도 있다. 하나의 현실이 존재하지만 그걸 해석하는 방향은 다르다. 영화는 가능한 하나의 방식만을 취한다. 어떤 게 더 좋은 선택인지에 관한 질문을 하는 영화.   

시간은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 안에서 움직인다. 인간은 의지를 갖고 있다. 롤라는 달리면서 유모차를 미는 여성을 심하게 부딪히면서 지나간다. 유모차 여성은 롤라에게 욕을 해댄다. 이후 그녀의 미래상이 펼쳐진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어렵게 아이를 키우다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다. 국가는 그녀에게 아이를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아이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그녀는 결국 다른 아기를 훔치는 범죄자가 된다. 불행한 운명에 대한 예고다. 이 시간에 유모차를 끌고 가던 그녀가 겪게 되는 여러 인연들이다.

운명을 바꾸는 건 자신의 의지다. 롤라는 누워서 죽음의 순간에 잠시 생각한다. 돈뭉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과거를 떠올린다. 마니와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허공에 뜬 돈뭉치는 그녀의 사고 속에선 마니와의 통화가 끝난 바로 그 시점의 전화기와 같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롤라는 유모차를 끄는 여자를 조금 늦은 시간에 마주쳐 본다. 다시 한번 유모차 여성의 운명이 바뀐다. 그녀는 복권을 사게 되고 당첨이 되어 남편과는 헤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아이도 국가에 빼앗기는 일은 없어진다. 아이는 유복한 환경에서 행복을 구가하며 사는 인생으로 변한다. 

종래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현실을 말해 왔지만, 이 영화는 하나의 현실도 세 개의 다른 이야기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영화에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인류의 모든 이야기는 다 나온 셈이다, 이제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중요하다. 이야기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결과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이야기다. 인간의 존재 역시 그저 있음(Being)이 아니다. 완성된 존재라기보다 되어가는(Becoming) 존재인 것이다. 

있음에서 되기란 있는 현실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되짚어 보는 것, 재구성해 보는 것을 말한다. 있는 모습을 다르게 바라보거나 다른 식으로 재구성하는 자세다.  「롤라런」은 되기의 철학을 수행하는 작품이다. 롤라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도 여러 개가 있고 그 모든 것을 결정짓는 요인은 자기 자신이다. 

정재형(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정재형(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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