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1:55 (금)
대륙의 미학 역설의 시학
대륙의 미학 역설의 시학
  • 김재호
  • 승인 2020.10.16 0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현택 외 지음 | 삼인 | 396쪽

 

2020년,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보다 더 긴 시간, 그러니까 1990년 9월 30일 국교가 수립되기 전까지 20세기 중후반의 4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서로에게 ‘적’이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현 러시아연방의 전신인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을 치른 탓이다. 여기서 비롯된 적대 관계는 소련이 혹독한 체제 변혁을 겪고 한국 정부가 ‘북방정책’을 추진한 결과 끝이 났다. 섬멸하거나 온몸으로 경계·기피할 대상은 하루아침에 우호와 선린의 상대가 되었다. 이는 눈 깜빡할 새 흐름이 바뀌는 국제정치에서도 흔한 사례라고는 할 수 없을 테고, 두 나라로 하여금 서로를 그저 심드렁하거나 심상히 대할 수 없게 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관계의 가파른 변전을 겪은 두 나라 사이에서는 수교 이후 30년간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던가?

『대륙의 미학 역설의 시학』은 러시아와 남다른 인연을 간직한 한국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 27명이 자신의 러시아 체험을 써 내려가는 가운데 수교 이후 30년간의 두 나라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문학과 예술 전공자들에서부터, 통역가, 기업인, 물류와 통상 전문가, 고고학자, 북한 연구자, 언어학자, 과학기술인, 기자에 이르기까지 필자들의 직업과 관심 분야는 광범하고 다채롭다. 세대적으로도 수교 훨씬 이전부터 러시아를 연구한 이들부터, 수교에 힘입은 최초의 러시아 유학생 출신(함영준, 엄구호), 2000년대 들어 처음 러시아 땅을 밟은 이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필자들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다른 무엇에 앞서, 각계에 종사하는 여러 세대의 한국인들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작성한 흥미로운 러시아 기행문이다. 필자들이 서로 다른 삶의 구비에서 러시아라는 나라를 만난 사연, 그곳의 자연과 풍광, 살림살이, 사람들에 대한 인상과 감회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격변을 겪어온 한 거대한 사회를 애정 어린 타인의 눈길로 접한 관찰기인 이 책의 글들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체험을 통해 성장해온 필자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나아가 한국 사회에 대한 자전自傳적 회고와 성찰의 기록을 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가 러시아에서 배우고 얻을 것은 무엇인지, 두 나라 관계의 빈 곳은 어디에 있고 그것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관하여 긴요한 정책적 제안과 채근을 담고 있기도 하다.

책의 1부에 실린 글들은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해온 문학과 예술을 매개로 이 나라와 만난 경험을 초점에 둔다. 석영중(도스토옙스키)과 이강은(고리키)이 러시아 문학의 고전들에 21세기 한국인의 시선으로 다시 접근하고 있다면, 노벨상을 받은 현대 시인 브로드스키를 앞장세운 이지연의 글은 시인의 고향이자 러시아 예술의 젖줄과도 같은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심층 탐사를 진행한다. 함영준은 체호프를 길잡이 삼아 연극의 세계에 투신하게 된 경위를 열정적으로 적고 있으며, 신혜조의 글은 러시아 발레의 성장사를 되짚으면서 진정한 예술 창조와 향수의 자세를 일깨워준다. 홍상우의 글은 소련 시절 러시아 영화의 역사를 일군 노장들을 만나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전하는 보기 드문 비망록이다. 김현택의 글은 한국계 러시아 소설가 아나톨리 김, 그리고 동시대 러시아 예술가들과의 교유를 진진하게 소개한다.


2부에는 러시아를 한층 더 직접적으로 취재하고 답사한 글들이 모여 있다. 각각 통신사와 방송사 기자인 유철종과 임현주의 글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러시아 사회의 흐름, 한국 및 러시아의 미디어 환경과 그 공백 지대에 대한 간결한 보고다. 김진영의 글은 소련에서 러시아연방으로 이행 중이던 혼란한 때 현지에 머문 체험이 표면적인 이야기를 이루고 있지만, 그 체험이 포괄하는 시공간은 눈앞의 현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20세기 초중반 러시아를 희망의 근거지로 삼았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필자 자신도 관여하여 1990년대 초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고위층 젊은이들의 운명이 새로운 이야기의 가지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글의 시공간은 단숨에 팽창하면서, 범용한 외국 체류기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구자정과 라승도의 글도 단순히 드넓은 러시아 영토를 누비고 다닌 여행의 단편을 전하려 하기보다는 러시아혁명,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기나긴 시간이 빚은 러시아 근현대 사회문화의 뿌리에 다가가려는 의욕을 배경에 두고 있다. 문득 떠난 여행에서 마주친 러시아 시골의 고즈넉한 풍경을 묘사하는 강봉구의 글에서도 필자의 눈길이 오래 가닿는 곳은 이미 반세기 전에 과학적 조림으로 붉은 소나무 숲을 만들어낸 러시아 옛사람들의 마음 공간이다. 이처럼 눈앞의 현실을 벗어난 시공간과의 대화는 다름 아닌 고고학의 본업일 테니, 시베리아의 유물과 자료를 찾아 25년을 보낸 고고학자가 “한국에서 실크로드, 그리고 중국 북방을 이어서 한국과 유라시아의 고대 역사를 밝힌다는” “인생의 목표”(강인욱)를 말하는 대목을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3부는 러시아를 무대로 경제적 사업을 추진해온 이들, 또 더 넓은 의미에서 한국과 러시아 간의 사회경제 협력을 구상하고 연구하는 이들의 글을 엮었다. 필자들은 수교 이후 오랫동안 중소기업(박종호), 전자회사(이상준)나 철강 업체(송종찬)에서 러시아 시장 개척을 위해, 또 정부 출연 연구기관(성원용)에서 유라시아 대륙횡단철도 연결을 기획하며 분투한 현장의 경험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간 한국과 러시아의 협력 관계는 잠재력에 비해 기대에 많이 못 미쳤다는 것이 오늘의 시점에서 필자들이 냉정하게 내리는 판단이다. 필자들은 이런 부진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타개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칠 만큼 많다고 본다. 홍완석의 주장을 빌리면,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해야 할 까닭은 이 나라가 식량·에너지·물 등 한반도의 미래 생존과 직결된 전략 자원의 보고일 뿐 아니라 굴지의 경제력,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 사실상 미국과 자웅을 겨룰 유일한 군사력을 갖춘 대국이며, 한국이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에 휩쓸리지 않고 정치경제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이웃이라는 데 있다. 비슷한 취지에서 이대식은 이렇게 쓴다. “중국에는 경제적으로, 미국에는 안보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도 중간국의 위상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때 가장 적합한 파트너가 바로 러시아다.”


마지막으로 4부에는 그처럼 러시아와의 교류 및 협력을 증진하려 할 때 필요한 조건과 자세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는 학자 및 과학·기술인들의 글이 실려 있다. 무릇 이질적인 상대끼리의 교류와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통역가로 최일선에서 활동하며 매번 “더 나은 실패”에 도전할 따름이라는 이혜승의 글이 새삼 깨우쳐주는 바다. 소통과 교류를 가로막는 요인들은 (정치학자 기광서가 증언하는 대로) 한·러 국가 기관 간 최초의 학술 저술 공동 출판 사업을 날려버린 “관료적 행정 체계”이기도 하고, (통일연구원의 현승수가 곤혹스럽게 고백하듯이) 정권에 따라 대북·통일 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러시아 학자에게 “도대체 한국이 원하고 지향하는 한반도 통일이란 무엇인가?”라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하는 우리 안의 분열과 결핍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과학자 서길원의 지적처럼, 러시아의 인력과 기술은 값싼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턱없는 오만과 자기중심주의도 한국인 스스로 넘어서야 할 벽이다.


상대와 진정으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언어학자 홍택규가 갈파하듯이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또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지식 체계에 의해 생산된 정보들을 나의 지식 체계에 적용·환류해보는 것”이 필수적일 터이다. 나와 타자의 이러한 상호 작용을 견실하게 동반한다면 “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양국 역사 관계 연구”(엄구호), 냉전 기간 내내 “반공과 혁명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양 갈래로 찢겨 있었던 20세기 러시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한국인의 손으로 그려내는 “소비에트의 재발명” 기획(김수환)은 물론이고,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일반적인 소통과 교류 활동도 생산적인 결실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