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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여행_과학적 사유의 즐거움
테마여행_과학적 사유의 즐거움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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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월드'에는 뭔가가 있다

과학적 사유는 미세한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데 가장 큰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동식물들의 천변만화하는 세계에 침입한 과학자들은 오랜 인내와 애정을 기울인 끝에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생의 비밀을 얻어낸다. 그 길을 같이 걸어보자.

감춰졌던 세계의 비밀을 드러내듯, 난해하고 궁금하기만 한 과학 분야의 연구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거대우주의 움직임에서부터 미세한 세포에 이르기까지 연구대상이 광범위한 만큼 사유의 방법들도 가지각색이다. 그 가운데 1마이크로미터의 세균의 세계에 들어가 그 안의 질서와 조화를 통찰하며 희열을 느끼는 ‘세밀한 과학적 사유’는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유의 책들은 예컨대 베르베르의 ‘개미’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섰듯 이미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번역서의 차원을 넘어 국내 과학자들도 각 분야에서 이러한 과학적 사유를 폭넓게 전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동물분야에서 눈과 귀를 크게 열고 작은 것들의 세계로 빠져든 두 과학자가 있다. 개미박사로 알려진 최재천 서울대 교수(동물행태학)와 달팽이박사 권오길 강원대 교수(동물학)가 그들이다. 

이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건 다음과 같다. 최 교수에겐 개미, 꿀벌, 거미, 새, 물고기 등이, 그리고 권 교수에겐 달팽이, 바퀴벌레, 귀뚜라미, 오징어, 쇠똥구리, 벌, 개구리, 나비 등이 흥밋거리다. 거기서 뭘 들여다보는지 그 재미들을 일별해보자. 최 교수가 푹 빠져든 ‘개미제국’은 이렇다. “전 세계 개미무게 총량은 인류집단 전체의 무게와 비슷하다. 개미는 인간보다 5천만년 일찍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또 진디, 깎지벌레, 뿔매미를 가축으로 키우며 산다. 열대지역의 아즈텍 개미는 다른 종끼리 합종연횡 해 국가를 건설했다가 일개미가 불어나면 세력다툼 끝에 한 여왕개미가 즉위한다.” 개미들의 세계는 마치 중세의 스케일이 큰 시네마를 감상하는 것처럼 거대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인간들보다 더 인간 같은 생활풍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권 교수는 바퀴벌레의 생존전략에 흥미를 느낀다. “바퀴벌레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꽁무니 뒤에 튀어나온 2개의 꼬리털 때문이다. 꼬리털에 달린 2백여 개의 부드러운 털이 미세한 바람마저 감지해 위기에 대처하도록 만든다.” 전염병을 옮겨 문명인에게 애물단지가 된 바퀴벌레의 생존전략을 진지하게 애정을 갖고 들여다본다.

하지만 두 교수 모두 곤충 혹은 벌레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해도 사유의 차별점은 분명해 보인다. 최 교수는 개미제국의 세력싸움에서 오히려 인간들 정치사회의 다툼을 떠올리고 이를 비판한다. 즉 그의 과학적 사유는 곧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타고 이어진다. 최근 그가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 刊)란 책에서 동물로 갈고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해 인간  DNA를 분석하며 호주제 철폐가 왜 정당한 지 논리적 이유를 끌어내는 것도 같은 맥락. 한편 권 교수의 사유들은 생명체가 자신의 ‘살이’를 안간힘을 쓰며 이어나가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살이에 필요한 도덕적인 교훈을 끌어내는데 그의 특징이라면 적절한 ‘의인화’와 유비기법을 통해 곤충과의 일체감을 끌어낸다는 점이다.

곤충과 인간 그리고 민들레 솜털 속의 우주

식물의 세계도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신개념 식물도감으로 대중적 사랑을 받아온 야생꽃 박사 이유미 씨가 대표적 연구자다. 광릉수목원이 직장인 이 박사는 제비꽃의 작은 꽃잎 속에서, 바람에 날아가는 민들레의 솜털 달린 씨앗 속에서 감춰진 우주를 발견한다. 일단 풀과 나무라면 다 그의 관심사다.

광릉수목원의 덩굴식물원에 있는 다래, 머루, 오미자, 노박덩굴, 사위질빵, 으름, 담쟁이덩굴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그의 일상이다. 특히 먹거리로 많이 쓰이는 덩굴식물의 생애가 그의 호기심을 많이 자극한다. 옛날 얘기에서 머루가 덩굴이 됐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왜 그랬을까 궁금해하며 그가 풀어낸 해답은 이렇다. “광합성에 필요한 햇볕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가야 했기에 생존전략상 덩굴이 된 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나쁘게 보면 다른 나무에 편승한 약삭빠른 식물이기도 하지만.” 궁금증은 또 이어진다. 아니,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감고 올라갈 대상이 있다는 걸 알까. “잎이나 줄기 일부가 변한 덩굴손이 자유롭게 허공에 흔들리다가 바람 때문에 주변에 감고 갈 대상에 닿으면 일종의 호르몬이 분비돼 1~2분 안에 자극이 온몸에 퍼지고 기존에 자라던 방향을 바꿔 물체를 감게 된다. 한바퀴 감는 데 약 1시간 30분 걸린다.” 이처럼 일상에서 “아하! 그렇구나”하고 무릎을 탁치는 발견들이 바로 그의 연구의 흥미로움이다.

나무박사 박상진 경북대 교수의 연구대상 역시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작은 것들이다. 그의 전공은 나무의 세포형태를 공부하는 목재조직학. 커봐야 손톱만하고 작으면 가로세로 1㎜도 안되는 나이테를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해 수많은 나무 문화재의 비밀들을 밝혀낸다. 그의 관심은 나무생태학이 아니라 나무의 역사고증학인 셈이다.

그동안 그의 연구로 밝혀진 잘못된 역사적 사실도 많다. 먼저 그 제작과정이 신비에 휩싸여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박 교수는 대장경의 목질을 탐색해본 결과 그 재료가 기존에 알려진 ‘자작나무’가 아니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라는 걸 밝혀낸다. 그렇게 추산해볼 때 대장경의 제작장소는 강화도가 아니라 그 두 종의 나무가 집단서식 했던 해인사 근처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박 교수는 또한 천마총에 1천년동안 보관돼온 신라유물 ‘천마도’의 재료 또한 자작나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나무는 고구려처럼 추운 나라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천마도는 자작나무와 쓰임새가 비슷하고 신라지역에 많았던 거제수나무나 사스레나무로 봐야한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박 교수는 최근 이런 나무역사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묶어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김영사 刊)을 펴내기도 했다. 나무 한 조각 한 조각을 분석하는 건 세밀한 작업이지만 그 결과 우리가 알게 되는 지식은 몇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만큼 방대한 스케일을 지닌다. 사유의 시작과 끝의 이 놀라운 격차도 나무연구의 매력이리라.

장구한 세월의 탐색이 빚어낸 매혹들

사람들은 식물을 대상화시켜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나무는 늘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도 생의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는 급박한 장이다. ‘신갈나무 투쟁기’(지성사 刊)의 저자 차윤정 박사는 신갈나무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을 통해 긴 세월의 마디마디에 담겨진 자연의 엄혹한 질서와 숙명을 깨닫게 한다. 잘려진 줄기에서도 가지를 뻗어내고, 적은 양의 빛으로도 크게 성장하는 생존력이 신갈나무가 번성하는 한 요인인데, 숲 전체를 시야에 넣고 신갈나무가 ‘숲의 강자’로 자리매김해가는 과정을 그림과 함께 펼쳐놓는 광경이 볼 만하다. 차 씨는 ‘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중앙M&B 刊)란 또 다른 저서에서 식물의 사생활에 좀더 세밀한 상상력을 틈입시킨다. 가령 식물도 자살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답은 예스다. 온실에서 자라는 화초는 주인의 정성어린 손길에 때 이른 꽃을 피우는데 이는 사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한다. 꽃을 피운다는 건 자기 代의 생명을 끝낸다는 의미이므로 화초는 꽃을 빨리 피워 얼른 죽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인간과 자연의 이런 비교의 방식은 때론 교훈적이라기보다는 인간중심적 해석은 아닐까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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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세한 것들을 탐구하는 과학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감정을 깔고 있어 인문사회과학적 사유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적 자리를 보게 한다. 또 이들의 연구는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기도 하다. 최재천 교수는 자기가 연구하는 것들이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은 멀기만 하다고 털어놓는다. 그가 희귀곤충인 조렙테라로 박사논문을 쓰기까진 18년, 아즈텍개미로 첫 논문을 내는 데는 13년이나 걸렸다. 박상진 교수도 현미경과 씨름하며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세포의 세계를 30년이나 추적해왔다. 이미 고인이 된 나비박사 석주명은 논문 한줄 쓰려고 나비 3만마리를 손으로 만졌으며, 권오길 교수의 연구들도 지원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수십년간 매달려온 작업들이다. 생명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당대에 마무리 될 수 없을 정도로 장구한 세월을 요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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