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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미술이 엮어내는 퍼포먼스 '예술가의 편지'
언어와 미술이 엮어내는 퍼포먼스 '예술가의 편지'
  • 이승건
  • 승인 2020.09.25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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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예술가의 편지: 다빈치로부터 호크니까지 │ 마이클 버드 지음 │ 김광우 옮김 │ 미술문화 │ 224쪽

엿보는 즐거움, 보이는 작품 세계
창작의 베일을 슬며시 들추다
수취인 불명 ‘독자’들의 개봉을 기다리다

 

 

요사이 편지 받으신 적 있으신가요? 가까운 분들의 안부가 궁금하거나 나의 근황을 알리기 위해, 정성스레 몇 자 적어 내린 한 장의 편지를 곱게 접어, 우체통으로 달려갔던 때가 언제였던가요? 기억마저도 가물거립니다! 어느 새인가 스마트폰으로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나 전화, 그리고 E-MAIL, SNS 메신저 등 종이와 펜을 대체하는 새로운 전자 매체들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 잊었던 손 편지의 정감어린 향기는 물론이거니와 예술가의 작품 세계 이면에 흐르는 창작의 베일을 슬며시 들쳐 주기까지 하는 번역서(마이클 버드 / 김광우 역, 『예술가의 편지: 다빈치로부터 호크니까지』, 미술문화, 2020, 총224쪽)가 새삼 우리의 눈길을 빼앗습니다.

 

편지(片紙)! 글자 그대로 조각 종이, 안부나 소식 따위를 알리기 위한 글로 이해됩니다만, 이와 같은 편지의 일반적인 뜻에서 벗어난 좀 특별한 편지들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대화록』 43편에서 거의 자신을 화자로 등장시키지 않는 플라톤에 대해, 그의 면모를 조금이 나마 알게 해 주는 디오니시오스 및 디온 등에게 보낸 13통의 편지(『서한집』(Epistolai))가 있습니다. 또한 덴마크 황태자 아우구스텐부르크가 보내준 보조금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미와 예술에 대한 자신의 미학적 견해를 3년에 걸쳐 총27통의 편지로 전달한 쉴러(1759~1805)의 『인간의 미적 교육을 위한 서한』(1795)도 있습니다. 여기에 자신보다 26년이나 나이 어린 젊은 학자 고봉(기대승, 1527~1752)과 13년 동안이나 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펼친 퇴계(이황, 1501~1570) 선생의 편지(『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가 더해 질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소개할 『예술가의 편지』 역시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 편지들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수취인에 한정되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을 수신인으로 하는 책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제인 『예술가의 편지』로 돌아와 보건대, 책의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다시피 이 책은 편지가 주인공입니다. 약 500 여 년간 미술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90여명 예술가들이 주로 손으로 써 내려간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선집(選集) 형태로 모았습니다. 예를 들어, 1482년 경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가 밀라노 통치자 스포르차(1452~1508)에게 보낸 이력서(122쪽)로부터 1995년 신디 셔먼(1954~ )이 미술비평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학자 아서 단토(1924~2013)에게 보낸 감사의 엽서(84쪽)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때로는 문필가나 사상가 등 사회의 식자층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과시하려는 듯한 인문학자의 유려한 필체로 작성한 편지(1550년 미켈란젤로가 조카 리오나르도에게 보낸 편지, 22쪽)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흐르는 절절한 감정을 공책 한 귀퉁이에 담은 내밀한 고백(벤 니콜슨(1894~1982)이 바버라 헵워스(1903~1975)에게, 158쪽)에 이르기까지 사연 많은 서간들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그리움에 책상 위 공책에 감정을 표현한
벤 니콜슨이 연인 바버라 헵워스에게 보낸 편지, 158쪽

 


미술사학자이자 저술가로 현대미술을 기반으로 왕성한 집필 작업(『멕밀란 미술사전』 편집팀 일원으로 활동 등)과 대중 강연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저자(Michael Bird, 1958~ )는, 자신의 커리어를 바탕으로, 90여 편의 편지들을 총 여덟 개로 묶는 편집의 묘(妙)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크게 두 부분 ― 즉 편지를 받는 사람(1장-가족, 친구에게, 2장-예술가에게, 4장-후원자, 지지자에게, 5장-연인에게)과 편지의 목적(3장-선물, 안부 인사, 6장-업무적인 용무, 7장-여행, 8장-송신 끝) ― 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손 편지는 종이 위 (…) 언어와 미술을 엮는 퍼포먼스다.’라는  마리 새비지(Mary Savig)의 인용(서문, 9쪽)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이 책의 편집을 통해 예술가들의 편지를 단순히 활자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편지를 스캔하여 지면 좌측에 함께 제시함으로써, 1차적으로 읽는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시각적인 쾌감(편지지 이곳저곳에 남긴 낙서나 드로잉뿐만 아니라 화가들의 실제 필적을 대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묘한 심미적 기분)의 촉발까지도 유도하고 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외젠 마우스에게 보낸 실제 손 편지(좌)와
관련 내용 및 설명(우), 1880년8월2일, 영어본 58쪽 / 번역서 64쪽

 


그렇습니다! 이 책은 95개 편지들이 저마다 특별한 사연을 품은 채 수취인 불명의 독자들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을 읽노라면, 한편으로는 제각기 개성 넘치는 손 글씨와 그것의 발신인으로서 예술가를 연결시켜보는 재미가 주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들의 작품에서는 미처 알아차릴 수 없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남몰래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언어와 미술이 엮어내는 퍼포먼스로의 초대인 이 책은 창작자로서 예술가에 대해 그리고 그의 손길이 닿은 소중한 작품에 대해 한층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할 때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책은 정통 미술사에는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그것을 모르고는 좀처럼 내용 파악이 쉽지 않은 미술사적 다큐멘터리로 꽉 차 있습니다. 특히 한글 번역서의 출간일(2020년 8월24일)은 영어본의 발행일(2019년 10월22일)로부터 채 1년이 넘지 않는 간극을 갖습니다. 이런 전문적이면서도 특이한 성격의 책이 이처럼 순발력 있게 번역된 데에는 지금까지 줄곧 현대미술과 문화비평 분야에서 부지런한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역자(김광우)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의 7장(여행, 특히 200쪽과 204쪽)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여행은 설렘을 유발하기 때문이니까요. 여러분들께서도 저처럼 이 책을 통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구입한 엽서 한 장에 내 자신을 수신인으로 하는 손 편지 한 번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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