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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
표준: 현실을 만드는 레시피
  • 이혜인
  • 승인 2020.09.14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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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의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 사물, 그리고 인간!
로런스 부시 지음 | 이종삼 옮김 | 한울엠플러스(주) | 512쪽

표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표준이 되게 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세상을, 현실을, 그리고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가?

만약에 동네마다 신호등 색깔이 다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나 면허증 없이도 차를 몰 수 있다면? 상점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화폐로 지불하려 하거나 물물교환으로 거래를 한다면? 쇠고기 한 근이 경기도에서는 400그램이고 충청도에서는 1킬로그램이라면? 용변은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해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없거나 화장실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가 없다면? 사람마다 인사하는 법이 제멋대로여서 팔을 긁거나 손뼉을 치거나 침을 뱉는 것을 인사라고 주장한다면? 이런 황당한 질문들은 늘 도처에 있고 끊임없이 인간사에 작용하지만 평소에는 대체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무엇, 너무나 습관화되어 당연시하기에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그래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에야 비로소 그 중대성이 드러나는 그 무엇, 바로 표준의 존재를 드러내준다.
표준은 우리의 생활에, 관계에, 생각에, 심지어 무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표준을 “현실을 만들어내는 레시피”에 비유하면서 표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즉 그것이 규범, 관습, 전통, 법률 등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것이 지닌 힘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권력관계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등을 어원에서부터 역사적 사례와 학문 간 논의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조사한다. 특히 이 책은 표준을 올림픽, 필터, 서열, 구분이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음을 보이면서 각 유형의 특징과 상관관계, 다양한 영역에서 그것들이 나타나는 양상 등을 상세히 살피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표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표준 그 자체를 논의한다는 것은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 얘기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무엇이 표준으로 간주되는지, 어떤 것이 표준을 성취하고 어떤 것이 그에 미치지 못했는지를 학습과 직관을 통해 자연스럽게 거의 매순간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자명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바로 표준의 한 특성이기도 하다. 이 책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연구할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고 너무나 편만한 것이어서 감히 손대지 못해왔던, 보이지 않는 권력이자 현실을 창조하는 메커니즘인 표준을 우리 앞에 가시화한다.

이를 위해 이 책이 수행하는 심층적이고 인문학적인 접근은 표준에 대한 도구적이고 경제학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는 기존 관련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이 책은 사회학, 경제학, 철학, 윤리학 등의 다양한 학문 경계를 넘나들며 뒤르켐, 하이데거, 애컬로프, 듀이 같은 석학들의 논의에서부터 화장실 변기와 아동낙오방지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검토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네 가지 표준 유형과 좋은 표준을 수립하기 위한 열두 가지 강령은 설득력이 있고 상당히 유용하다. 표준이 마치 공기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독자들은 자신의 삶과 현실세계를 또 다른 층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렌즈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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